(15)|〃협력중 외부와 전화 왜 합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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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사분규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달 19일하오, 전경련회장단 간친회에 참석키 위해 서울여의도 전경련회관에 속속도착하는 재벌그룹 총수들의 표정은 하나갈이 무겁고 침통했다.
『순수한 처우개선 요구때문 이라면 근로자들이 저렇게까지 과격하게 나올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맞습니다. 외부세력과 연계되지 않았다면 과격구호가 적힌 수만장의 유인물이 어떻게 나오며, 협상도 중 외부와의 전화통화는 왜 하겠으며, 해고근로자도 없는 회사에서 어째서 복직요구가 나오겠읍니까.』
이른바「외세개입」을 우려하는 재계 총수들의 목소리는 그들의 표정만큼이나 무겁게 들렸다. 외세와의 접촉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까지 확보해놓았다는 이야기도 나봤다.
『외부세력의 개입만 없다면 최근의 노사분규는 그리 걱정할게 없다고 봅니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근로자들의 처우개선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만큼 빠른 시일내에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할 자신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외부세력이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있는한 순조로운 타결은 어렵다고 봅니다. 단순한 처우개선만으로는 해결될 수없는 차원의 요구까지 해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날 ,모임에 참석한 재계 총수들은 건전한 양식을 가진 대다수의 근로자들에게 외세와 결탁하지 말아줄 것을 다시한번 간결히 호소하는 길 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구구절절이 애끓는 내용의 호소문을 채택했다.
『우리와 우리가족 모두의 생계와 보람이 걸려있는 일터가「외부세력」의 개입으로 장기휴업·조업중단, 나아가 직장폐쇄·폐업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노사의 손실이며 국민전체의 손실임을 생각해 주시고…』
실상 이 애절한 호소문은 외세와의 연계투쟁이 더이상 지속될 경우 직장폐쇄는 물론 폐업까지도 불사 하겠다는 사용자측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최후통첩 이었던 셈이다.
아무도 선뜻「외세개입」문제를 거론하기를 꺼리고 있을 때 가장먼저『외부세력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온 이는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었다.
그는 한때 이 발언 때문에 근로자들로부터 단단히(?)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나 파국의 위기로까지 치닫던 현대그룹 노사분규를 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같은 강력한입장표명과 이에대한 근로자들의 적극적인 호응 때문이었다.
소위 자유민주노조의 대표권문제와 관련, 심각한 진통을 거듭하던 현대중공업의 노사분규가 마침내 회사측의 자유민주노조 인정방침에 따라 극적으로 타결되던 날, 발표된 노사합의사항가운데 첫번째가 『자유민주노조는 앞으로 외부의 세력과 일체 결탁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는 것이었다. 회사측은 자유민주노조를 인정하는 조건으로「외세배격」을 내세웠고, 근로자측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것.
울산 현대중공업등 현대계열사의 노사분규가 위험수위 직전에서 극적 타결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외부세력 개입반대」에 노사가 공동전선을 펼수 있었던 때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울산지역 모대학의 학생연합회 소속 학생 7명이 현대근로자 농성장에 나타나「군부독재의 노사분열책동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자 오히려 학생들을 붙잡아 『너희들이 뭔데 참견하느냐』 며 말린 것은 근로자들이었다.
그러나 외부세력이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있는 경우 분규가 장기화되거나 타결 되더라도 다시 재연될 소지가 크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외부세력의 개입 때문에 심각한 진통을 겪은 럭키금성그룹의 경우 분규가 발생한 19개사업장 가운데 외세와 선이 닿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16개 사업장에서는 짧으면 2∼3일,길어야 1주일이내에 분규가 원만히 타결됐다.
그러나 외부세력이 강력하게 개입하고 있는 정황이 드러난 나머지 3개사업장은 보름이상씩 장기휴업 했거나 우여곡절끝에 타결됐더라도 재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라는것. 회사측은 모종교 관련 노동운동단체 인사나 위장취업 해고 근로자등이 분규에 직접 개입, 파업과 농성을 선동하거나 배후에서 협상방식과 절차등을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외부세력이 개입된 경우 순수한 근로자입장에서는 제시하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조건을 내세움으로써 타결을 어렵게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달12일부터 25일까지 무려 2주간에 걸친 휴업끝에 26일 상오8시부터 다시 조업에 들어갔던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은 조업재개 6시간만에 민주노조쟁취위원회측 근로자 2백여명이 본관건물 점거농성에 들어가 현재까지도 장기휴업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요구조건가운데는▲미GM사와의 불평등계약 파기▲기업공개등이 포함되어 있다.
장기화되고 있는 노사분규의 조속한 수습을 위해서는 외부세력의 개임이 배제된 가운데노사간의 자율적인 협상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 재계나 관계당국의 똑같은 입장이다.
노사분규에 개입하는 외세의 유형은▲위장취업이나 노동운동과 관련해 해고된 근로자들▲재야노동운동단체▲노학 연계운동을하는 대학생등으로 대별되는데 특히 위장취업 해고근로자가 많다는것이 관계당국의 분석. 대부분 대학졸업·중퇴자인 이들은 신분을 속이고 일선 근로현장에 뛰어들어 근로자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조직화하고 단체행동으로 끌어 내면서 보람을 찾는다.,
지금까지 제도권내 노동자단체나 조직이 제 구실을 못해온 만큼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신장한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활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있는·반면 이들이 결코 근로자자신일수는 없으므로 투쟁에는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고 자칫 순수한 노동운동이 정치투쟁의성격을 Elf 우려가 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대우조선근로자 이석규씨의 장례절차 및 장지결정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색 짙은 협상이 국민운동본부·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전국해고근로자 복직투쟁위원회·인노련·기독교노동연합회등 재야노동운동단체의 직·간접적인 개입의 결과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것.
결국 외부세력의 도움을 방지 않고도 근로자들이 합법적으로 노동운동을 할 수 있고, 합리적인 요구사항을 관철시킬수 있도록 관계제도를 조속히 개선하고, 사용자의 노사관을 근본걱으로 재정립하는것이 외세개입의 딜레머에서 벗어나 노사분규를 수습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관계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배명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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