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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인의이것이논술이다] 학원 '지식' 버리고 생각하는 힘 키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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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인 유웨이중앙교육 오케이로직 논술 대표강사

논술을 출제하는 대학교수들이 가장 노력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사교육과의 전쟁이다. 교수들이 공들여 문제를 개발하면 이는 어느덧 유형화되어 암기식으로 요약 정리된다. 한 교수의 말을 빌리면 출제위원들이 가장 노력하는 것이 학원에서 배울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문제로 만드는 일이라 한다. 이쯤 되면 교수는 도주하고 학원은 뒤쫓고 하는 일의 연속인 셈이다.

2006학년도 연세대 정시 문제의 경우 가히 그 노력의 결정판이다. 두 가지 노력이 돋보인다. 하나는 예년과 달리 "아래 제시문의 공통된 주제를 찾아 각 제시문을 분석하면서 사회문화 현상에 적용하여 논술하시오"라고 문제 유형을 예년과 전혀 다르게 바꿨다는 점이다. 예년의 유형에 집중하여 연습한 학생은 낭패를 보았음은 물론이다.

또 하나는 학생들의 선입견, 더 정확하게는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암기식으로 심어준 선입견을 적절히 활용했다는 점이다. 첫 제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역'의 화택규(火澤) 괘는 태하리상(兌下離上)의 괘다. 상리괘(上離卦)는 불(火)이고 하태괘(下兌卦)는 연못(澤)이다." 사실 어려운 내용이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한 해를 요약하는 사자성어로 자주 언급된 "태하리상"을 보며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물 위에 불이 있으니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얼마나 상극(相剋)이랴. 지난해의 사회 갈등을 요약하는 말로 제격이다. 더구나 여러 학원과 전문가들이 예상 문제로 강조했었다. 그리하여 공통된 주제를 '갈등'으로 설정한 후 갈등의 부정적 양상들과 그 극복 방안을 다룬 한 편의 글이 탄생했다. 허를 찌른 셈이다.

2006학년도 대입 정시모집 논술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논술 논란’이 일었다. 당장은 어렵지만 학교에서도 논술대비가 가능하도록 토론식 학습 등 학교 교육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사진은 수험생들이 논술고사를 치르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사실 그 제시문의 진의는 뒷부분에 나온다. "그 어긋남을 인식하면서 화협(和協)의 도리를 찾아야 한다." '어긋남' 또는 다른 제시문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불안'이 공통 주제이되 그것이 부정적인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협' 즉, 생성과 생산의 요소로 발전되는 측면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논술을 쓰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주입된 선입견이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눈을 멀게 하여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교수가 원하는 것은 암기된 배경지식이 아니라 논리와 논거를 갖춘 자기 나름의 생각이다. 이는 논술이 처음 도입될 때부터 의도되었던 부분인데, 일반인들과 학생들의 무지와 불안감을 이용하여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보다 속성으로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는 데 치중한 사교육에서는 일부러 외면했던 부분이다.

선입견을 버린 상태에서 주어진 자료에 충실해야 하며, 독해력과 이해력을 길러야 한다. 이는 모든 배움의 기본기며, 학교 교육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만회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논술을 연구하고 가르친 지 10년, 진정한 배움은 잘 배우려는 태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배웠다.

하긴 이 바쁜 세상에 어디서 진정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으랴는 회의도 많지만, 새로운 문제를 실험적으로 출제하려 애쓰는 교수들의 모습에서 논술 시험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사교육이라는 구더기를 핑계로 논술의 장을 담그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김재인 유웨이중앙교육 오케이로직 논술 대표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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