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공화총재 집중인터뷰|"국민심판받아 시비 가리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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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JP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80년의 5·17이후 7년3개월의 긴 침묵을 깨고 국내 신문으로는 최초로 본지의 집중 인터뷰에 응한 김종필전공화당총재-. 그는 이미 흘러간 은둔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그의 때를 기다리는 정치인의 체취가 짙게 풍겼다.
최근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김영광씨 (11대의원) 만 배석시킨 가운데 김전총재는 청구동자택에서 3시간 가깝게 그동안의 침묵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앞날에 대해서 얘기했다.『나는 과거를「해명」하지 않소. 다만「설명」할뿐이오』라고 말했으나 권력형 부정축재의 단죄, 그리고 타의에 의해 중단된 정치에 대한「명예회복」의 끈질긴 집념을 내보였다.
-모두의 관심이 김전총재의 대통령 출마 여부에 쏠려 있읍니다. 단도직입으로 묻겠읍니다. 출마하실겁니까.
『아직은 분명히 할때가 아닙니다.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있는 것은 있지만 아직 얘기할 때가 아닙니다.』
-어느측으로부터 출마하지 않았으면 하는 요청이 있었다는 소문이있던데….
『누구라고 밝힐순 없으나 그런일이 있었읍니다. 협력해줄수 없느냐고 하길래 내 입장에선 곤란하다고 분명히 거절했읍니다.』
-그동안의 침묵이「정치적 도피」라느니, 침묵으로 현정권에 협조했다느니 하는 비판도 있읍니다. 4·13때 한마디는 했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읍니다.
『내가 왜 안했어요. (그는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역정을 냈다) 여러분이 무서워 안써서 그렇지. 4·13직후 시골에서「고약한 짓」이라고 했어요. 4·13이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라고 분명히 했어요.』

<불출마요청 거절했다>
-권력의 핵심부에서는 80년당시 3김씨를 찾아가서 싸우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했다는데요.
『나도 그런 얘기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당시 그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어요. 만나자고 해도 그들이 오히려 기피했지…. 그리고 3김씨의 책임이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때 나는 야당 당사를 찾아다니며 페어 플레이를 하자고 했고 최규하씨 (그는 최전대통령을 언급할 때마다 불쾌한 표정이었다) 에게도「이번만은 공정선거를 하자」고 했죠. 상황이 더 고약하던 6·3사태때도 혼란을 넘겼는데 80년 상황은 그렇지 않았어요.』
-80년에 못한 걸 다시 하겠다는 것은 정권에 도전하겠다는 뜻입니까.
『해석이야 어떻든간에 우리에겐 맺힌게 있읍니다. 공화당이 별 이유도 없이 그렇게 운산무소될수밖에 없었는가, 공화당 재산이 그렇게 몰수되었어야 옳은지… 공화당 연수원은 당원들 성금으로 만든건데… 이런 모든 것에 대해 국민의 심판을 받고 시비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예를 회복해야지요.』
-잘잘못을 가리는 방법은 출마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읍니다. 부정축재가 아니었다고 재산을 돌려주고, 공화당을 복원시키는등의 방법도 있고, 법정에서 다툴수도 있지 않을까요.
『조금 더 두고 보면 알수 있을거요. 아직 때가 아니니….』
-명예회복을 하겠다지만 오히려 명예가 더 실추될 가능성도 있지않습니까.
『그런 계산은 안해요. 실추돼도 국민의 심판이라면 승복합니다. 그자체를 명예로 삼겠읍니다.』
-선거도 멀지 않았으니 이제는 출마해 정권에 도전하겠다거나, 공화당을 재건해 이끌겠다거나 명백히 할 시점이 아닙니까.
『때가 아니니까. (웃음으로 계속된 추궁을 막았다) 때가 오면 하고, 때가 안오면 안할수도 있고….』
-그「때」는 어떤 조건이 성숙돼야 합니까.
『현실 참여를 하겠다고 최종결정을 하는 때겠지요.』
-그 결정은 스스로의 결정입니까, 아니면 외부에서 출마하라는 소리가 높아져야 합니까.
『그런 소리는 관계없읍니다. 내가 이제 참여해야겠다고 결심이 서면 일어날겁니다.』
-3김씨와 노태우민정당총재 네분이 다 나오거나 노총재, 김영삼민주당총재가 나올 경우 전김총재가 충청도출신이라 유리할지 모른다는 말도 있는데….
『나는 그런 얄팍한 계산은 하지 않아요. 지역적인 것으로 나누는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공화당을 재건할 생각은 없읍니까.
『그 답변도 유보해둡시다.』 (웃음으로 대답을 피했다)
-국민당 의원중에 김전총재를 영입하자는 논의도 있는 걸로 아는데….
『상의받은 적이 없읍니다. 국민당 의원 몇몇이 자기들끼리 타개책을 강구하자고 했다는 말은 들었으나 코멘트하지 않았어요.』
-민족중흥동지회나 국민당등 구여권의 경우 체제내 힘의 분배·이익분배에서 소외된데 불만, 반발하는 것이란 말도 있읍니다.
『에이, 감투 배정을 못받아서 그런게 아니예요.』
-구여권 일부에서는 현재의 여권과 보수대연합을 할 가능성이 운위된다는 말도 들었읍니다.
『그런 말은 들어본 일이 없읍니다. 지금 그렇게 보수대연합늘 할 이유가 있는지 난 모르겠읍니다. 전환기에 여러 가능성은 있겠으나 지금 여건상 그건 어렵다고 봐요.』
-정치보복을 어떻게 보십니까.
『어떤 사람은 보복이란 말을 거침없이 하는데 나처럼 갈기갈기 찢긴 사람도 없읍니다. 김대중씨도 사형선고를 받았었으나 사면·복권으로 원인무효되지 않았읍니까. 그러나 나는 씻을수 없어요. 참기 어려운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읍니다. 그러나 전대통령도 역사입니다. 조용히 임기를 끝내도록 해야 합니다. 이승만대통령부터 전두환대통령까지 모두 오늘이 있게한 인물로 인정돼서 나란히 사진이 걸려 있을 때 민주주의의 땅이 굳을겁니다.』
-대통령직접선거를 있게하는 과정에서 두김씨는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며 나름대로 투쟁해왔는데 김전총재는 뭘 했느냐는 비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분들과 생각을 달리 했기 때문이죠. 5·17후 정권을 맡고 있는 사람들은 박대통령 품안에서 큰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유야 어쨌건 자신들이 해보겠다고 물러서 있으라고 해 지켜본 것이지요. 그래도 후배들이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읍니다. 그래서 조용히 지켜본거죠.』

<기발한 통일론삼가야>
-그 생각이 이제 바뀐겁니까.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은 우리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잘 해주길 바란다는 것이 전제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권이 무얼 했읍니까. 80년 우리가 과연 그렇게 당했어야 옳은가를 국민에게 물어봐야겠다는 마음입니다.』
-5공화국은 김전총재를「권력형부정축재자」로 단죄했었는데요.
『사실 여부에 불구하고 그런 대상이 됐다는데 대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내가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릴만큼 권력으로 치부했는지는 아직도 납득이 안갑니다. (그는 제주도 감귤밭·서산목장과 운정장학재단설립과정, 돈44억원, 현대경제일보사, 「머리만한」금송아지등등에 대해 20여분간이나 긴「설명」을 했다)
감귤밭과 목장은 이미 모두 장학재단에 기증해서 사회로 환원했던 것이지요. 그걸 몇10억이라고 쳐서 넣고…. 일요신문도 정보부장때 설립한 것이라 내것일수도 없고 소속이 불분명했는데 내것이라고 도장을 찍으라해서 찍을 수밖에 없었고…. 돈은 정치자금하라고 갖다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당비등에쓰고 있던 것이었읍니다. 금송아지는 사돈 이원만씨가 국무총리된 기념으로 선물한건데 머리통만하기는 커녕 엄지손가락만한거였어요…. 정치적인 희생양이 필요했었던 것은 이해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8년동안 뭘 했어요. 이사람들 8년 한것과 비교해서 국민심판에 물어보면 어떤 것인지 알수 있겠지요.』
-5공화국을 어떻게 보십니까.
『5공화국 평가는 삼가겠읍니다. 다만 5공화국 정통성에는 문제가 있읍니다. 60년대, 70년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절대빈곤 추방, 공업화에 집중해 밀고나가야했지요. 당장 먹는게 문제인 판에 민주주의가 서식할데가 어디 있었읍니까. 그러나 한숨 돌린 80년대는 민주화·인간화 시대입니다. 80년은 국민의 심판을 받아 국민의 선택으로 정통성 있는 정부가 나왔어야 했어요. 더 이상 체육관 선거는 없어야 했읍니다.』
-민주당 정치인들이 능력이 없다고 5·16을 일으키셨듯 3김씨에게 시국안정 능력이 없어 군대가 나왔다고 할수는 없읍니까.
『3김, 3김하는데 3김이야말로 80년대에 바람직한 출발을 하기 위해 몸부림친것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책임이 있읍니까. 공화당도 그때는 이미 여당이 아니라 다수당에 불과했읍니다.
정당하는 사람이 무슨 힘이 있읍니까. 지금도 민정당에 힘이 있읍니까. 힘있는 사람이 뒤에서 눌러주니 사회가 그런대로 안정을 유지하는거지.』
-그럼 10월유신은 어떻게 보십니까. 후계자가 될 기회를 잃었으니 피해자란 관점도 있고, 또 당시 총리로서, 여당의원으로서 그 체제확립에 기여한 것도 사실인데….
『박정희대통령은 5·16을 일으켜「굶지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제도고 뭐고 가리지 않고 앞만보고 가다가 세상을 떠난, 정치가가 아닌 혁명가읍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3선개헌·유신을 밀고 나갔는데, 물론 반대의견을 개진했지요. 그러나 박대통령이「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최선을 다하겠으니 협력해달라」고 하셔서 저도 여기에 응했던 것입니다.』
-충남에서 강연할때 유신잔당이란 소리를 들었다는데 심정이 어땠읍니까.
『일단 유신에 참여했으니 잔당이건, 본당이건간에 저항감은 갖지않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때 청중들에게 「나는 따지고 보니까 잔당이 아니라 본당」이라고 했어요.
현집권층은 80년8월 유신헌법으로 집권했고, 6개월후에는 유신헌법보다 나을 것 없는 헌법으로 이어 왔읍니다. 그러니 잔당은 이 사람들이고 나는 본당이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청중들이 웃더군요.』
-박대통령은 절대빈곤 추방에 매진했다고 했는데 앞으로의 경제정책은 어때야 한다고 보십니까.
『흔히 민간주도라고 말로만 그럴게 아니라 정말 경제는 민간인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들은 이윤 추구에 최선을 다하는 전문가들이거든요. 정부는 다만 그늘진 곳, 소외된 곳에 손을 쓰는 정책을 펴면 된다고 봅니다.』
-최근 노사분규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노동자들의 불만 표출은 어느면에서 당연한 귀결이라고 봐요. 공업화를 촉진해온 한 사람으로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인간적인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에는 가슴이 아팠읍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타당하다고 보나 그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피땀흘려 만들어 놓은 것이 현재의 우리나라인데 감정이 격하다고 해서 파괴한다거나 폭력을 써서는 안되겠죠.』
-노사분규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이제 와서「알아서 하라」고 나오는 것은 책임 회피입니다. 이럴 때엔 빨리 개입해 성의있게 중재에 나서야죠. 쓸데없는데 개입하지 말고….』
-5공화국이 취한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는요.
『한마디로 열심히 했다고 인정합니다.』
-노사분규 해결에 있어「혁명적방법」은 안좋다고 했는데, 혁명을 일으킨 분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이상하게 들립니다만….
『아, 내가 했기 때문에 말할수 있지…. 그 방법은 한번이면 족해요.(웃음) 이제 우리도 양식과 순리에따라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여력은 생긴 것 아닙니까. 이 마당에「한꺼번에 해치우자」「혼란이 오면 싹 쓸자」는 단세포적 발상은 안됩니다.』

<젊은세대 경원말아야>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80년의 재판이 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은데요. 선거가 가능하기는 하겠느냐 걱정도 있고요.
『재판이라는게 무엇입니까. 3김씨 경합상을 뜻하는겁니까. (이 대목에서 언성을 높이며) 묘하게 물리적 힘이 개입해서 어떻게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우려에 대해서는 저는 낙관합니다. 「5·16」이나 「5·17」을 겪으면서 국민들간에는「군인이 정치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의식구조가 확고히 자리잡았읍니다. 이는 민주발전에 있어 큰 수확이죠. 물론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면 계엄군이 나와 단기적인 임무수행을 하게되고 이는 국민들도 당연하다고 여길겁니다. 그러나 군인이 그대로 눌러앉아 정치에 개입하려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겁니다.
군내부에서도 쇼크 효과를 내기위해 행동할수는 있겠으나 정치개입은 해선 안된다는 양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이고 있읍니다.』
-학생들 중에는 혁명정부 수립이니, 노학연대투쟁이니 하는 소리가 있고 이와 관련해 9월 위기설등도 나도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과도기에는 여러 소리가 나오는거죠. 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지금이 아니라 정권이 바뀌고 앞으로 2년까지가 심각한 상황이 될것으로 봅니다. 각계의 욕구가 분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예상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다만 소련도 서구생활의 풍습을 그리워하고 있는 마당에 무언가 역행하는 사고를 젊은 세대가 갖고있는 것은 문제죠. 그러나 이들을 경원도 말고, 뒤에서 부채질도 말고 이들 속으로 들어가 설득해야죠.
평양가겠다고 한다고 보낼수 있읍니까.
이런 상황이 오게된 데는 위정자나 언론의 책임이 큽니다.』
-언론이야 3공화국이 꽁꽁 묶었잖아요.
『에이, 시끄러워요.』(웃음)
-언론통제 기술은 그때부터 시작된것 아닙니까.
『좋아요. 뭐라고 할말 없읍니다. 그러나 사회문제를 해결해야할 제기능들이 편파적인 것 같아요.』
-김대중씨의「공화국연방제」주장으로 물의가 있었읍니다만….
『통일문제에 대해 개인이 기발한 생각을 내뱉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통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한간의 신뢰 회복입니다. 73년의 6·23선언으로 충분합니다. 그 위에 뭐가 있겠읍니까.』
-슬하에 1남1여를 두신걸로 들었는데요.
『딸은 시집가고 아들 진이는 미국 유타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고대 경영학과에 들어갔었는데 나도 권유하고 자기도 좋다고 해 정치학으로 바꿨읍니다.』
-정치인으로 키울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나는 이번에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고 내가 못한걸 곱으로 보태 해보게할 생각입니다.』
-여성관은 어떻습니까.
『좀 고루할지 모르나 남녀는 유별입니다. 사회에는 남자할 일과 여자할 일이 따로 있읍니다.』
-가족법 개정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공화당때부터 논의돼온건데…결정적인 변화가 없는 범위에서 점차적으로 손질돼야겠죠.』
-정치인에게는 어떤 내조 스타일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드골」대통령의 부인같은 형입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유세할 때마다 따라가 차속에서 청중이 모르게 연설을 듣습니다. 남편일에 관심은 갖지만 나서진 않아요. 부인이 전면에 나서면 여러가지 말들이 생기게됩니다.』
-박영옥여사는 그런이상형인가요.
『사실 저 사람은 고집이 세요. 그 고집이 때로는 내가 불필요한 일을 안하게 눌러줍니다. 천생배필인지…그래서 해로하는거죠.』
-건강은 어떻습니까.
『보시다시피 건강합니다.』
-그림은 계속 그리십니까.
『무사분주라 금년에는 두장밖에 못그렸읍니다.』
-스스로는 혁명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다만 희랍혁명에 투신했던 시인「바이런」을 혁명가라고 한다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로맨티시스트라는 얘기를 많이들으셨죠.
『로맨티시스트가 아니면 그런 일 (5·16혁명) 못하죠.』 <끝><정리=안희창·김진국기자>
인터뷰팀 성병욱 편집부국장 김영배 정치부차장 신성순 경제부차장 권순용 사회부차장 박영옥 문화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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