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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랄레스 정권 출범을 보는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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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해 12월 실시된 대선에서 모랄레스는 득표율 54%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볼리비아 인구의 65%를 차지하는 인디오들은 같은 인종 출신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한 백인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해 온 소수지배 전통이 깨진 것이다. 원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표로 결집돼 모랄레스 정권을 탄생시켰다.

모랄레스는 인종적 단층선을 선거 전략에 활용했다. '인디오 포퓰리스트(대중인기영합주의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지난 500년에 걸친 인디오들의 저항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나의 형제들에게 알린다"면서 "볼리비아 인디오들에 대해 수백년간 이어져 온 온갖 차별과 압박의 세월은 종식됐다"고 강조했다. 포퓰리스트라는 꼬리표는 임기 내내 그의 행보를 제약하는 족쇄가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랄레스의 등장에 세계적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중남미에 불고 있는 좌파 바람 속에서 그가 집권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권은 단순한 역사적 상징성을 넘어 21세기 국제질서의 새로운 흐름과 맞닿아 있다는 시각도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랄레스 정권 출범이 갖는 의미는 다층적이다.

우선 그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명백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취임식에서 그는 "볼리비아의 만성적 빈곤을 해결하는 데 실패한 신자유주의 모델을 폐기할 것이며 어떤 외부 강대국에도 종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계화'라는 큰 흐름 속에 종전의 백인 정권들이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 모델이 원주민을 억압하는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것이 모랄레스의 입장이다. 개방과 자유화를 통한 성장 우선 모델은 국내외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만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볼리비아 원주민의 전통산업인 코카 재배를 합법화하고, 남미에서 매장량 규모 둘째인 천연가스 산업을 국유화하겠다고 공약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공약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분배 중심의 좌파정책으로는 빈곤 탈출이 어렵다는 것은 이미 굳어진 정설이다. 이웃 나라인 칠레는 좌파정권이면서도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가미한 실용적 좌파 노선을 통해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느 정도는잡았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이 좌파 노선으로 집권해 중도우파적 실용노선으로 돌아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모랄레스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식 반미노선을 실제로 걸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차베스는 세계 5위의 산유량을 무기로 '21세기 사회주의'실험을 하고 있다. 차베스가 고창(高唱)한 반미(反美)의 새로운 축에 모랄레스도 수사(修辭)적으로는 동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구체화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미국과 떨어져 홀로서기는 어려운 것이 중남미 국가들의 현실적 한계다. 당장 미국이 마약 단속 차원에서 요구해온 코카 재배의 불법화를 모랄레스가 원점으로 되돌릴 경우 연간 1억 달러의 원조가 끊기게 된다.

중남미의 좌파바람은 베네수엘라.볼리비아식 반미좌파 노선과 브라질.칠레.아르헨티나식 실용좌파 노선으로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모랄레스가 뉴스를 만들지는 모르지만 역사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호르헤 카스타녜다 전 멕시코 외무장관의 예측이다.

배명복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