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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분규 이대로는 안된다|분규는 있고 수습대표는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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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1일 하오8시40분쯤 용산서울시내버스 노조지부 회의실. 열기로 가득찬 실내는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서울시내버스가 파업을 할것인가를 다시 논의하는 회의. 『5일간의 말미를 두고 그때가서 경정하자』 며 김우삼지부장 (60)이 주먹으로 책상을 세번 쳤다.
순간 『당장 파업에 들어가자』『파업하면서 협상하자』는 고함이 터져나오고, 이때부터 회의장은 사실상 무질서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단위조합장들은 고혈압으로 쓰러진 지부장을 병원으로 옮기지도 않고 전면파업을 결의했다.
협상전권을 맡은 지부장이 철야 협상 끝에 회사측대표와 타결한 단체협약을 파기하고 나선 것이다.
요구만 있고 그 요구를 관철한 대표는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단위운수조합장들의 불만은 11%인상안을 아무런 협의없이 받아들이고 서명했다는 것이다. 28.4% 인상을 위임했지 11%로 타결토록 협상 전권을 맡기지는 않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지부장이나 노조측 협상 대표들은 5%이상 올려즐수 없다는 사업주측의 마지노선을 뚫기위해 무릎을 꿇고 사정했으며, 한꺼번에 얻으려면 아무것도 손에 넣을수 없다는 실득도「어용」으로 몰아 붙이는 열띤 분위기에 압도돼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지부단위의 단체협약은 일부단위노조의 불복때문에 효력을 상실하게되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것이다. 분규는 있고 수습할 대표는 없어진 셈이다. 최근의 노사분규가 장기화되고 있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물론 기존노조와 새 노조가 있어 조직분규가 겹칠 때는 거의 예외없이 그렇지만, 조합원 스스로가 대표로 인정한 협상대표의 타결결과를 불복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서울시내버스노조의 경우 이를 지켜본 시민들로부터 지탄을 면할수 없게됐다.
고대 김용기교수는 『대표권은 조직구성원 대다수의 지지를 얻은 대표권자가 조직원의 의견을 수렴, 행사할 때 인정받을수 있다』며 『선출과정은 정당하더라도 구성원의 의견수렴과정에 잘못이 있거나 그 반대, 또는 둘 다 잘못됐을때는 대표권을 부인당하고 조직자체가 혼란에 빠진다』고 했다.
김교수는『그러나 최근의 노사분규에서 보는 조직원의 대표자에 대한 대표권부인은 군중심리로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과격한 요구가 정당한 것으로 오인되는 상황과 조직내부의 주도권 다툼에도 기인된다』며 『이는 근로자가 스스로의 지위를 격하시킬뿐 아니라 실익이나 명분도 잃게되는 투쟁방법』이라고 말했다.
21일부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간 대우조선의 경우도 서울시내버스와 같은 타결번복으로 시작됐다. 근로자들은 지난11일 노조를 결성, 집행부에 협상권한을 위임했다가 협상이 타결되자 이에 불복, 농성을 다시 시작했고 결국 회사측의 무기한 휴업결정을 부른것이다.
대우조선근로자들은 지난9일부터 기본급 3만원인상과 가족수당·근속수당 각2만원씩 지급을 요구하면서 농성을 벌여오다 11일 노조를 결성했다. 새로 탄생한 노조집행부 (조합장 양동생) 는 전후 6여차례의 협상끝에 회사가 연간 4백여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다는 점을 감안, 기본급 1만원 인상과 가족수당·근속수당의 내년 검토에 잠정합의했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이 합의안의 수락을 거부, 농성은 풀리지 않았다. 결국 회사측은 무기한 휴업을 결정했으며 근로자들은 이에 반발, 가두로 진출해 옥포호텔난입등을 시도하다 이석규씨가 숨지는 불상사가 빚어졌다.
노조대표들은 20일 회사측과의 합의사항을 전체근로자의 찬반토론에 부쳐 최종적인 합의를 유도하려했으나 저율인상에 불만을 품은 강경론자의 반대에 밀려 「합의파기」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대우조선 분규가 쉽게 타결되지 않는것은 「조선경기불황·적자경영」을 앞세우는 회사측과 회사경영상태를 무시하고 요구사항 관철을 주장하는 근로자간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는 것이 근본적인 요인이지만 자신들이 선출한 노조집행부에 대한 근로자들의 불신, 이에따른 노조집행부의 대표권·지도력 상실도 분규재연의 큰 원인이 되고있다.
협상대표를 뽑아놓고 대표권을 행사한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데서 온 후유증은 오래갈것 같다. 사태수습은 전적으로 근로자들이 노조대표를 얼마나 믿느냐에 달려있는 셈이다.
최근의 노사분규에서 타결됐던 협상이 깨져 분규가 재발하는 가장 큰 원인은 근로자들의 노조주도권 장악을 위한 대표불신임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심한경우는 서로가 어용이라며 대표로 인정하지 않는다. 삼척탄좌 근로자들이 21일부터 재파업에 들어간것은 노조조합장선거를 앞두고 노조주도권장악을 노리는 광원대표들이 노조집행부가 타결한 협상내용에 대해 불만을 지적하고 나서면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서울대 이상면교수(법학)는 『대표권자의 합의사항에 대한 반발·비토는 노사간계약제도가 확립되지 않은데서 나타나는 비민주적인현상』이라고 지적하고 『근로자들은 대표권을 위임받은 노조집행부가 사용주와 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할 경우 합의내용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이를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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