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하루 만든 흥국 김재영-김수지 자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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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경 기자

[한국배구연맹]

17일 인천 계양체육관. 흥국생명이 IBK기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승리하자 자매는 환하게 웃었다. 똑같은 분홍색 유니폼을 입고 함께 만들어낸 첫 승리였기 때문이다. 흥국생명 센터 김수지(30)와 세터 김재영(29) 자매에겐 잊지 못할 하루였다.

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은 이날 경기에서 강적 기업은행을 상대로 어려운 경기를 펼쳤다. 주전 세터 조송화가 연습 때 입은 왼무릎 부상으로 결장했기 때문이다.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이 "이기는 것보다는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는 걸 먼저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흥국생명 선수들은 3-1로 승리하며 선두(14승5패·승점41)를 굳건히 지켰다. 2위 IBK기업은행(11승9패·승점36)과의 격차도 벌어졌다.

박 감독은 경기 뒤 "(이가 없지만) 잇몸이 잘 버텨줬다"고 말했다. 박 감독이 말한 잇몸은 김재영이다. 올시즌 한 번도 스타팅으로 나선 적이 없었던 김재영은 조송화의 빈 자리를 메웠다. 1세트에는 레프트 이재영과 호흡이 흔들렸지만 주포 타비 러브에게는 확실하게 공을 올려줬다. 2세트 중반 잠깐 교체됐던 김재영은 다시 코트에 들어간 뒤에는 냉정을 되찾았다. 3점 이내의 접전이 펼쳐졌지만 마지막까지 제 몫을 해냈다.

김재영은 '배구 가족'이다. 아버지 김동열 원곡고 감독과 어머니 홍성령 전 원곡중 감독 모두 배구선수였고, 언니는 김수지다. 김재영은 2006-07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현대건설에 지명돼 1년 먼저 입단한 언니 김수지와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승승장구한 언니와 달리 김재영은 프로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다. 두 시즌 동안은 22경기(42세트)에 나섰지만 웜업존을 지키는 훨씬 많았다. 2008-09시즌부터는 3년간은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결국 은퇴를 결정한 김재영은 호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김재영을 코트에 돌아오게 만든 사람은 언니와 어머니다. 김재영은 "언니가 그냥 오고가는 말로 흥국생명에서 '다시 하자'고 했다. 며칠 안 돼 엄마가 호주에 왔고, 일주일만에 짐을 싸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부모님이 제일 원했고, 나도 현대 때 자주 못 뛰어 미련도 있었다"고 돌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해 이수정 코치가 플레잉코치로 뛸 만큼 세터난에 시달렸던 흥국생명도 김재영의 합류가 반가웠다. 박미희 감독은 "우승팀에 있었고, 고교 시절에도 우승을 해봤다. 무엇보다 배짱이 있는 친구라 선택했다. 경험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5년 만에 V리그로 돌아온 김재영은 1라운드에선 한 번도 코트를 밟지 못했다. 하지만 팀내 제2세터로 조금씩 감각을 끌어올렸고, 2라운드부터 출전기회를 조금씩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송화의 부상으로 어렵게 잡은 기회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공격수 전원을 활용하진 못했지만 러브(34점)의 능력을 잘 끌어내면서 승점 3점을 따냈다. 김재영은 "프로에 들어와서 풀세트를 뛴 건 한 두 번 뿐이었다. 1등을 지켜야 하고 상대도 IBK라 부담이 컸는데 주공격수를 잘 살리자는 생각을 하고 블로킹은 낮은 쪽 위주로 봤다"고 말했다. 그는 "나부터 어색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정말 정신없이 경기했는데 이겨서 기쁘다"고 웃었다.

힘들어한 김재영을 든든하게 지켜준 건 언니였다. 김재영은 "언니가 '블로킹은 안쪽으로 떠올라라. 수비는 이렇게 하라'는 식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얘기해줬다"고 웃었다. 언니는 '동생의 플레이를 점수로 매겨달라'는 질문에 "경기 결과는 이겼기 때문에 90점이다. 하지만 토스만 따지면 60점이다. 볼 배분이나 2단 연결은 터무니 없는 공도 있었다"고 평가를 하기도 했다. 김수지는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한 만큼 '기회를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V리그는 형제자매 선수가 적지 않은 편이다. 한유미(35·현대건설)-송이(33·GS칼텍스) 자매, 이재영(21·흥국생명)-다영(21·현대건설), 이민규(25·OK저축은행)-민욱(22·삼성화재) 형제, 김수지-김재영까지 현역 선수만 넷이나 된다. 그러나 한 팀에서 뛰고 있는 건 김수지-김재영 뿐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언니 김수지는 동생이 안쓰럽지만 일부러 다른 선수들과의 특별 대우는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냉정한 편이다. 김수지는 "어린 선수들에게는 조금만 잘해도 칭찬을 한다. 하지만 (김재영은) 가족이고, 좋은 말을 하면 약해지고 기댈 거 같아서 애초에 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재영은 이날 경기 뒤 '수지 메달'을 목에 걸었다. '수지 메달'은 김수지가 프로야구 한화에서 활약한 외국인투수 유먼이 만들었던 메달을 본따 만든 것으로 수훈 선수에게 걸어준다. 김수지는 "올해는 웜업존에서 제일 파이팅을 한 선수와 메달을 받은 선수에게 간식같은 선물 쿠폰을 줬다"고 말했다. 김재영은 "언니가 맛있는 걸 사주기로 했다"며 이날 경기장을 찾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인천=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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