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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하늘로 간 ‘테스트 파일럿’ 1호 민영락 대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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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2004년 10월 ‘부활호’ 복원 행사에서 만난 민영락옹(오른쪽)과 부활호 설계자 이원복 옹. [사진 공군]

2004년 10월 ‘부활호’ 복원 행사에서 만난 민영락옹(오른쪽)과 부활호 설계자 이원복 옹. [사진 공군]

한국의 첫 ‘테스트 파일럿’인 민영락 공군 예비역 대령이 13일 별세했다. 92세.

1953년 첫 국산기 ‘부활’ 시험비행
일제 땐 가미카제 특공대 끌려가
출격 2시간 전 해방 돼 구사일생

테스트 파일럿은 새로 개발하는 항공기의 시험비행을 맡는 최고 기량의 조종사로 극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민씨는 소령이던 1953년 10월 공군 사천기지에서 국내 최초 개발 군용기인 ‘부활’호의 첫 시험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부활호는 한국전쟁 직후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됐기 때문에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비행으로 그는 ‘대한민국 1호 테스트 파일럿’의 영예를 안게 됐다.

민씨는 일제 때 “조선인 차별이 없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에 일본 육군 비행병학교에 입학했다가 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의 자살특공대에 끌려갔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오전 11시 출격 예정이었지만 갑작스런 복통 때문에 오후 2시로 늦춰졌다. 그날 낮 12시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광복 후 교편을 잡았던 민씨는 1949년 창설된 공군에 입대해 공군사관학교 비행교관이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민씨는 전투에 투입됐다. 그는 1950년 9월1일 정찰비행에 나갈 계획이었지만 다른 임무가 주어져 천봉식 중위가 대신 출격했다. 천 중위는 적 전투기 3대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민씨에겐 이게 평생 가슴의 상처가 됐다고 한다. 부활호의 기체번호는 천 대위(사후 대위로 추서)의 성과 같은 발음인 ‘1000’과 국운 융성을 바라는 행운의 숫자 ‘7’을 더한 1007번이 됐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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