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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은 이의 가장 서늘한 복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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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30면

이 영화, 무시무시하다. 피튀기는 장면이나 괴성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불편한 느낌이 이어지며 보는 이의 감정을 고조시키지만, 화면은 차가운 고요 그 자체다. 영화가 끝나는 동시에 경직된 근육이 풀려버린 관객들의 낮은 한숨이 터져나온다. 탄탄한 이야기와 영리한 연출이 완성시킨 매혹적인 심리 스릴러물이다.


영화는 모자와 신발만 걸친 해 살을 출렁이며 춤을 추는 고도비만 중년 여성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이 장면은 주인공인 아트디렉터 수잔(에이미 아담스)이 기획한 현대미술 전시의 상영물이다. 수잔은 부유한 남편에 화려한 직업을 가진 상류층 엘리트 여성이지만 깊은 공허감에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인생이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에 휩싸인 그녀에게 전 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로부터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의 소설 초고가 도착한다.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야행성 동물)’는 에드워드가 함께 살 때 수잔에게 붙여줬던 별명. 영화는 이후 3중 액자 구도로 흘러간다. 거짓과 허영으로 가득한 수잔의 현재 삶과, 에드워드가 보낸 소설 속의 비극적인 사건들. 그리고 수잔과 전 남편 에드워드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과거 회상 장면이 교차한다.


소설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한 남자 토니의 이야기다. 토니는 아내와 딸을 태우고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외진 고속도로를 달리다 불시에 나타난 괴한들에게 위협을 당해 차를 강제로 갓길에 세우고 만다. 이후 토니의 가족이 악당들에게 당하는 수난은 간접경험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들만큼 무섭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수잔의 끔찍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왜 수잔에게 이 소설을 보낸 걸까.

탄탄한 이야기 구성은 원작 소설의 몫이다. 미국 신시내티대 영문과 교수이자 소설가인 오스틴 라이트가 1993년 쓴 스릴러 소설 『토니와 수잔』이다. 라이트는 70대에 쓴 이 소설에서 항상 더 높은 곳을 욕망하는 여자와 낭만적이지만 유약한 남자의 사랑과 갈등, 파국과 복수를 그렸다. 특히 토니가 주인공인 소설의 전개와 더불어 에드워드와 수잔 사이에 감춰졌던 사연이 조금씩 드러나는 방식은 세련되고, 치밀하다. 영화 개봉과 더불어 한국판 소설도 출간됐다.


2009년 영화 ‘싱글 맨’을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56)는 두 번째 영화인 이 작품을 통해 각본가로서도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는 대학 강사이던 수잔의 직업을 아트디렉터로 바꿔,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을 맘껏 발휘했다. ‘구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며 ‘관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던 그는 영화에서도 관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소설 속 잔인한 사건이 벌어지는 텍사스 사막의 황량한 풍경, 차가운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수잔의 집 등 탁월한 공간 연출로 관객들의 감정선을 쥐락펴락 한다. 단아하면서도 묘하게 관능적인 수잔의 옷차림 역시 그의 내면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된다.


복잡한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배우들의 연기력도 감탄할 만하다. ‘아메리칸 허슬’ ‘빅 아이즈’로 2년 연속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에이미 아담스는 이 영화에서 ‘눈으로 하는 연기’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준다. 특히 신음소리 하나 없이 극한의 공포를 표출하는 눈빛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잔상이 남을 정도다. 에드워드인 동시에 소설 속 토니 역까지 맡은 제이크 질렌할도 스스로의 나약함에 몸부림치다 극한으로 치닫는 남자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영화의 마지막, 소설을 다 읽은 수잔은 에드워드에게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e메일을 쓴다. 그리고 오랜만에 거울을 보며 미소 짓는 연습을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간다.


톰 포드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살아가면서 내리는 결정들과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이야기다. 버리는 것에 익숙한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작품은 충성심, 헌신, 그리고 사랑을 말한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감독의 변처럼 따뜻하지 않다. 조금의 구원도 허용치 않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누군가를 향한 가장 잔인하면서도 슬픈 복수에 대한 이야기란 생각이 들게 한다. 2016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청소년 관람불가. ●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 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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