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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오바마 대통령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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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트럼프타워’의 로비 2층 커피숍에서 이 글을 씁니다. 열흘 뒤면 이 건물 주인이 당신을 이을 미국 대통령이 되겠군요. 8년 전 기억이 엊그제와 같습니다. 취임식을 사흘 앞둔 2009년 1월 17일, CNN을 통해 본 감동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포용·감동 리더십 남기고 아름다운 퇴장
국민이 느껴야만 ‘철학과 소신’ 지도자

 독립선언이 있었던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DC로 향하는 기차를 탄 당신을 보고자 기찻길에는 엄청난 미국인이 몰렸습니다. 영하 13도. 첫 정차역인 델라웨어주 윌밍턴역 광장에 새벽 4시부터 몰려든 인파는 새로운 퍼스트레이디 미셸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합창했습니다. 두툼한 장갑과 모자를 쓴 아이, 백발의 노인이 함께 손 잡고 당신을 반겼습니다. 오후 4시에 정차한 볼티모어역. 4만 명 인파 중 흑인과 백인 여성 두 명이 머리를 비스듬히 맞대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8년의 임기 동안 당신만큼 스캔들 없이 많은 정치적 업적을 남긴 대통령도 드물 겁니다. 경제성장률을 -6.2%(2008년 4분기)에서 3%로 끌어올렸고 1560만 개의 일자리를 새롭게 만들어냈습니다. 오바마케어를 통해 2000만 명 이상의 성인, 300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새롭게 보험 혜택을 받게 됐죠. 전직 대통령 7명이 시도하다 모두 실패했던 겁니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 파병한 미군 수도 17만5000명에서 1만5000명이 됐습니다. 원수처럼 지내던 이란·쿠바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아쉽다면 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겠지요.

 포용과 감동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역설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 전 이야기한 ‘철학과 소신’에 그 답이 있다고 봅니다.

 ‘오바마의 말과 글’에는 철학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힘은 군사력이나 부의 규모가 아닌 우리가 품은 이상의 지속적인 힘, 즉 민주주의·자유·기회, 그리고 굴복하지 않는 희망에서 비롯됩니다.” 8년 전 즉석 연설입니다. 공화당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던 명대사입니다. 정확하고 옳은 메시지를 쓰니 울림이 있습니다. 우주, 초딩 어법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뿐일까요. “리더십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감으로써 발생한다”는 사회학자 찰스 쿨리의 말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철학과 소신도 행동이 수반되고 국민이 느껴야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 거죠.

 흑백 갈등이 극에 달했던 2015년 5월. 백인 청년의 총기 난사로 목숨을 잃은 흑인 목사의 장례식에서의 화합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당신은 무턱대고 인종차별주의 백인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더니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총)’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반주도 없었고 정확한 음정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선창에 영결식장을 가득 메운 6000명이 피부색에 관계없이 전원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불렀습니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화면에 비친 그들의 얼굴엔 분노와 좌절보다는 희망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미 국민 스스로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재발견하는 순간이었다고 봅니다. 지도자란 뭔지 새삼 느꼈습니다. 8년 전 미국이 ‘흑인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뽑은 게 만약 도박이었다면, 전 훌륭한 배팅이었다고 믿습니다.

 “지난 8년 변화와 진보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미국인 여러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제 삶의 특권이었습니다.” 지난 5일 당신이 내놓은 고별사의 한 대목입니다. 압권입니다. 우린 이런 생각,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언제쯤 맞이할 수 있을까요. 오늘(10일) 당신의 고향 시카고에서 하는 마지막 대통령 고별연설이 열흘 후 이곳 건물 주인의 대통령 취임연설보다 더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

 54년 전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미국은 진정 위대해질 수 있느냐”고 물었죠. 8년 전 저는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없습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