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지강헌 탈주극 그린 영화 ‘홀리데이’ 주연 이성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사진=안성식 기자]

12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지강헌을 연기한 배우 이성재(36)를 만났다(하지만 그의 극중 이름은 지강혁이다). "실존 인물인데 부담스럽지 않았나"란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끌렸어요. 갇힌 자와 벗어나는 자,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탈옥 소재가 매혹적이었죠. 게다가 잡범인데도 중형을 선고받은 지강헌도 궁금했고요."

촬영 전, 그는 넉 달에 걸쳐 무려 10㎏을 뺐다. '몸짱'을 노린 게 아니었다. "극 중 지강혁의 얼굴을 포착하고 싶었어요. 날카롭고, 전혀 편하지 않은 마른 얼굴 말이죠." 그래서일까. 스크린에서 만난 이성재는 분노와 독기, 소외당한 설움과 갇힌 자의 고독까지 버무린 지강혁에 온전히 포개져 있었다.

그는 '육화 배우'란 말을 꺼냈다. "신인 때였죠. TV드라마 '거짓말'(1998)에 출연할 때 노희경 작가가 쪽지를 하나 주더군요." 거기엔 '육.화.되.어.라'란 다섯 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성재의 연기 스타일은 달랐다. "배역의 사회적 조건, 육체적 조건을 일일이 따진 뒤 저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죠." 최근에야 '육화'의 의미를 알았다고 한다. "이젠 억지로 애쓰지 않아요. 그냥 나를 비우죠. 비운 만큼 배역과 하나가 되더군요. 로버트 드 니로나 알파치노도 100% 배역과 하나 되진 못해요. 아주 조금씩은 늘 자신이 남아 있죠." 그게 배우의 숙제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지갑에는 항상 그 메모가 꽂혀 있다.

영화 '홀리데이'와 실제 '지강헌 사건' 사이에는 다소 간격이 있다. 뼈대는 실화지만 영화에는 허구의 살점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탈주범을 쫓는 교도소 부소장(최민수)과 연희동의 전직 대통령 저택 습격 등은 모두 드라마를 위한 허구다. 또 있다. 인질극 당시, 지강헌이 요구한 음악은 비지스의 '홀리데이'였다. 그러나 경찰이 실제 갖다준 테이프는 스콜피온스의 '홀리데이'였다. 이성재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강헌은 결국 원하던 음악을 듣지 못한 채 죽은 셈"이라고 말했다. 대신 영화에선 드라마틱한 설정 등 이런저런 이유로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흘러나온다.

이성재는 "전북 군산에서 8박9일간 찍은 마지막 인질극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죽음 직전에 짓는 지강혁의 표정 때문이었다. "어떤 표정일까. 어떤 표정일까. 수도 없이 고민했죠." 그러다 우연찮게 신문을 보다가 답을 찾았다. 바로 '휑한 눈빛'이다. "삶에 대해 지친 자, 극도로 절망한 자가 보내는 휑한 눈. 이성재는 그걸 잡았다. "마지막 촬영이 있던 날, 새벽에 일어나 혼자 뛰었어요.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찍고 싶었거든요. 그래야 '휑한 눈'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실제 그는 인질극 장면을 찍은 뒤 곧장 바닥에 드러누웠다고 한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이틀 뒤였다. "아침에 일어나 달리는데 울컥 눈물이 나더군요. 그동안 교감한 '지강헌'이란 인물 때문에요. 정말 허탈하고, 정말 서럽더군요. 사귀던 애인과 헤어질 때도 안 그랬는데 말이죠."

'공공의 적'에서 살인마 역을 맡은 뒤 이성재에겐 광고 출연 섭외가 뚝 떨어졌다. 어찌 보면 배우에겐 치명타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탈옥수 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고액 개런티나 거대 제작비는 조금도 부럽지 않아요. 대신 '더 록'의 숀 코너리는 부럽죠. 백발을 휘날리며 연기하는 70대 배우. 저도 그 나이에 문근영 같은 20대 여배우와 멜로든, 액션이든 찍을 수 있길 바라요. 그때는 정말 배우의 얼굴을 가지고 있겠죠."

글=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