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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세진 알파고 7~8초 만에 뚝딱, 포석부터 상상초월 기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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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18면


지난해 12월 29일 한국 바둑 사이트 타이젬에는 ‘매지스터(Magister)’라는 아이디가 혜성같이 등장했다. ‘매지스터’는 이틀 동안 커제·박정환 9단 등 세계 최고수를 상대로 30전 전승을 거두고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지난 2일 글로벌 바둑 사이트 한큐바둑에는 ‘마스터(Master)’라는 또 다른 아이디가 등장했다. ‘마스터’ 역시 3일 동안 세계 최고수를 맞아 30전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마스터는 2~3일 한큐바둑에서 최초로 자신을 이기는 사람에게 10만 위안(약 1700만원)을 주겠다고 상금까지 내걸었지만 승자는 나오지 않았다.


‘매지스터’와 ‘마스터’가 쓰러트린 상대와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다. 한·중·일 랭킹 1위인 박정환·커제·이야마 유타 9단이 모두 패배자 명단에 올랐다. 박정환 9단은 총 다섯 판을 도전했으나 한 판도 따내지 못했고, 세계 최강인 커제 역시 세 판을 도전했으나 전패의 치욕을 당했다. 국내 상위 랭커인 박영훈·김지석 9단, 중국의 톱 랭커인 퉈자시·스웨 9단 등도 무기력하게 돌을 던지고 말았다.

[알파고? 알파고!]

'알파고'가 세계 최고수들과 온라인 바둑 대결을벌여 60전 전승을 거뒀다. 온라인 바둑 사이트 ‘타이젬’(위)과 ‘한큐바둑’. [사이트 화면 캡쳐]
바둑계에서는 ‘마스터’와 ‘매지스터’의 정체에 대한 뒷말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기력이 프로기사를 압도한다는 점, 수읽기가 빠르고 완벽하다는 점을 들어 이들의 정체가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라는 추측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구글 측은 모든 대국이 끝날 때까지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소문만 무성했던 ‘마스터’ ‘매지스터’의 정체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CEO)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의 트위터를 통해서다. 지난 5일 허사비스는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는 지난 며칠 새로워진 ‘알파고’의 성능을 실험해보기 위해 ‘매지스터’ ‘마스터’라는 온라인 아이디를 사용해 타이젬과 한큐바둑에서 대전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또 “모든 대국은 모두 완벽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알파고’가 세계 최고의 프로기사를 상대로 60전 전승을 거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허사비스는 또 조만간 두 번째 세기의 대결이 열릴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는 “바둑협회들, 전문가들과 함께 올해 안에 공식 경기를 열고 바둑의 심오한 미스터리를 탐험하기를 기대한다”며 “조만간 추가적인 내용을 발표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로써 재대결은 기정사실화됐는데 현재 ‘알파고’의 상대는 세계 최강인 중국의 커제 9단이 유력하다. 지난해 말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 창업자와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중국 베이징의 중국기원을 방문한 바 있다. 이들은 녜웨이핑 9단과 면담을 갖고 커제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을 놓고 협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파고, 포석부터 전혀 다른 바둑 구사"]
지난해 3월 이후 다시 등장한 ‘알파고’의 기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알파고’는 모든 대국에서 초반부터 가볍게 우위를 선점했고, 바둑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의 역전도 허용하지 않았다. 대부분 대국에서 불계승을 거뒀는데, 어쩌다 나온 계가 바둑도 종국에 집 차이만 좁혀졌을 뿐 승부의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다. 특히 대부분의 대국자가 170수 언저리에서 불계패를 선언했는데, 이는 보통 대국의 종국 수순인 250~300수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그만큼 세계 최고수들이 ‘알파고’를 상대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대국을 포기한 것이다.


프로기사들은 ‘알파고’가 지난해 3월 이세돌 9단과 대결할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평가했다. 신진서 6단은 “업그레이드된 ‘알파고’는 훨씬 강력했다”며 “모든 수를 쉽게 처리하면서도 완벽한 바둑을 구사했다”고 말했다. 박영훈 9단은 알파고가 포석부터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바둑을 구사했다”며 “초·중반에 이미 승부가 끝나버려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배했다”고 설명했다. 김지석 9단 역시 알파고가 세계 최고수들보다 두 점 정도 잘 두는 것 같다”고 평했다.


특히 새 버전의 ‘알파고’는 연산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실제로 허사비스는 트위터에서 “새로운 프로토 타입 버전을 사용해 빠른 시간 동안 컨트롤하는 테스트를 거쳤다. 그 결과 희망대로 작동했다”고 말해 이번 경기의 목적이 ‘알파고’의 빠른 연산 속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음을 밝혔다. 60번의 대국은 대부분 30초읽기로 진행됐는데, ‘알파고’는 7~8초 만에 모든 수를 두며 유유히 승리를 가져갔다. 제한시간 2시간으로 치러진 지난해 3월 이세돌과의 대결에서 ‘알파고’는 한 수를 두는 데 평균 66.8초를 사용했다.

[바둑 미래 위해 중지 모을 때]
이번에 공개된 ‘알파고’의 성장은 바둑계에 또다른 충격을 던졌다. 문제는 프로기사를 능가하는 수준의 AI 바둑 프로그램이 이제는 ‘알파고’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가 AI 바둑 프로그램에 딥러닝(Deeplearning) 기술을 도입해 성공을 이룬 다음, 경쟁사들도 동일 기술을 받아들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 텐센트 그룹이 지난해 3월부터 ‘알파고’ 타도를 목표로 개발 중인 ‘싱톈(刑天)’은 지난해 말부터 한큐바둑에 나타나 세계 최고수를 상대로 90%대의 승률을 올리고 있다. 이제까지 ‘싱톈’을 상대로 승점을 올린 선수는 커제·박정환·구리·구쯔하오 9단 등 네 명뿐이다. 일본의 AI 바둑 프로그램 ‘딥젠고(DeepZenGo)’ 역시 성장세가 무섭다. ‘딥젠고’는 일본의 IT업체 드왕고가 2009년부터 개발한 AI 바둑 프로그램 ‘젠’의 상위 버전으로, 지난달 29일부터 타이젬에 등장해 세계 최고수를 상대로 90%를 웃도는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아직 프로기사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AI 바둑 프로그램들도 있지만 딥러닝 기술의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대다수 AI가 인간을 넘어설 날이 멀지 않았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프로기사보다 수준 높은 AI 바둑 프로그램의 상용화나 다른 분야로의 활용도 빨라질 전망이다. 이현욱 8단은 "AI 바둑 프로그램이 상용화되는 시대에는 바둑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은 막막한 상태"라고 털어놓았다.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AI의 등장은 바둑계의 위기이자 기회”라며 “급변하는 시대에 바둑의 미래를 위해 중지를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아람 기자 aa@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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