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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비타시옹’ 정신 기반, 여소야대 돼도 정치 마비 없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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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호 5 면


지난해 11월 초 프랑스 파리 시내. 2017년 4~5월(1, 2차 투표) 대선에 출마할 중도우파 야당 공화당의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당내 경선이 한창이었다. 한국에서처럼 요란한 정치행사나 구호는 찾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신문·방송에서는 연일 경선 관련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대선 열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대선 이후 한 달 내에 하원의원을 선출하는 총선도 실시된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무르익은 것이다. 직선제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이냐 뿐 아니라 어느 정당이 의회 다수당이 될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대통령과 권력을 분점하는 총리가 집권당이 아니라 다수당에서 배출되기 때문이다. 물론 집권당이 다수당이 될 수도 있다. ‘분권형 대통령제’라 불리는 프랑스의 정치 현장을 찾아가 봤다.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동거). 프랑스 분권형 대통령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용어다. 실권을 가진 국가원수 대통령과 행정부 수반인 총리가 서로 다른 당 출신일 때 나타나는 동거 정부를 말한다. 1958년 시작된 프랑스 제5공화국에서는 이른바 ‘좌우 동거 정부’가 지금까지 세 차례 있었다(표 참고). 대통령 임기가 7년, 하원의원 임기가 5년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있었던 일이다.


2000년 개헌으로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줄여 하원의원과 임기를 맞춘 이후 들어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정부에서는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같은 당에서 지명됐다. 프랑스 사회당의 모리스 브로드 세계화·규제·대외협력 담당 비서는 “대선 직후 치러지는 총선에선 새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여소야대 상황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가 불신임되거나 의회가 해산될 경우 대통령과 하원의원 임기가 다시 일치하지 않아 새 동거 정부가 탄생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통령이 원치 않는 인물 총리 될 수도]
프랑스 대통령은 62년 개헌 이후 직선제로 선출되고, 총리는 의회 다수당 출신 인사 중에서 임명된다. 프랑수아 고드망 유럽외교관계이사회 아시아·중국 프로그램 대표는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 소수일 경우 대통령이 원하지 않는 사람이 총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식 정치제도는 근본적으로 분권과 협치를 기반으로 한다. 의회와의 관계를 맡고 있는 총리가 다수당 출신이기 때문에 여소야대에서도 국정이 혼선을 빚는 경우는 잘 벌어지지 않는다. 고드망 대표는 “여당이 소수인 경우에도 분권 시스템 덕분에 프랑스 정치가 마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4·13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의석에 못 미쳤는데도 야당 출신이 총리에 임명되지 않은 한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한국에서는 집권여당이 절대다수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야당의 적극적인 협력 없이는 정부의 법안 통과가 사실상 큰 제약을 받게 되고 정치는 쉽게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다.


윤기석 충남대 교수는 “프랑스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결선투표제로 연정이 가능한 시스템”이라며 “이원정부제가 연정을 만드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하지만 의원내각제를 취하는 독일에서처럼 협약을 통해 연정이 수립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 대통령제도 아니어서 야당 총리가 이끄는 정부와 대통령의 관계가 껄끄러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권력분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동거 정부 때 협치 정신이 필요하다. 대통령과 총리 간의 정책 조율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다. 브로드 비서는 “미테랑 대통령이 첫 동거 정부 때 대통령의 외교·국방 고유권한을 주장했지만 여소야대 상황에서 실제로는 대통령이 총리와 권한을 공유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쟁선포나 국제조약 서명 등은 물론 대통령의 고유권한이지만 그 준비 과정에서 내각과 협조하지 않을 수 없고 의회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드골 대통령이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을 때는 ‘제왕적 대통령’ 성격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 분담과 균형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분권형 대통령제의 가장 큰 특징은 총리가 의회와의 관계에서 ‘책임 있는’ 정치를 한다는 점이다. 총리는 외교뿐 아니라 모든 내정에 관여하며, 대통령과 협력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공유한다. 중도좌파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중도우파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긴장관계를 유지했지만 이때도 공동 결정을 취하는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국가 주요 행사에서 기념사를 대독하는 명목상의 자리를 넘어 실질적인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고드망 대표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은 전쟁과 평화 관련 사항, 국방과 외교에서도 헌법에 명시한 정도”라며 “여소야대인 경우 대통령과 총리의 의견이 다를 때는 총리가 자기 정책을 실행한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좌우 동거 내각 당시 세 총리 모두 경제·사회정책 등에서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들의 정책을 밀어붙였다”고 소개했다. 이런 경우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자리는 손꼽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대통령은 고위공직자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총리가 제청하는 인물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브로드 비서는 “헌법을 해석하고 실행하는 방법은 대통령에 따라 많이 달랐다.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고 말했다. 헌법은 동일하지만 실제로 진행된 행태를 보면 동거 정부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피에르 자크망 공화당 공보담당은 “좌우 동거 정부 때는 주로 대통령이 정책 방향을 정하면 총리는 이를 실행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대통령과 총리의 관계는 헌법 규정보다 개성에 따라 좌우됐다.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이 중첩되는 부분에선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특히 충돌하는 지점이 외교와 유럽연합(EU) 관련 부분이다. 예를 들면 유럽집행위원회 회의에 시라크 대통령과 조스팽 총리가 함께 참석해 다른 국가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크망 공보담당은 “정부 내에서 갈등이 생길 때 대통령이 총리 주도로 의회를 통과한 법안에 서명하지 않고 버틸 수 있지만 결국은 총리 의사대로 흘러간다”고 말했다. 총리의 힘은 의회와의 합의를 통해 나오기 때문에 대통령이 대부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동거 정부가 아니었던 사르코지 정권 때처럼 대통령이 전면에서 권력 행사를 강하게 하고 나서면 총리는 뒤로 약간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같은 당에서 배출될 경우 총리의 역할이 꼭 필요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르코지 정권 때 총리를 지냈던 프랑수아 피용은 “총리가 거의 필요 없지 않느냐. 그냥 대통령이 장관들과 일하면 되지 않느냐”며 자신의 역할이 매우 미미했음을 고백할 정도였다고 한다. 피용 전 총리는 지난해 11월 야당인 공화당의 대선 후보에 당선됐다. 그는 오는 4~5월 프랑스 대선 본선 1~2차 투표에서 당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총리직 지낸 직후 대선 출마한 후보들 실패]


분권형 시스템에서 대통령은 전체 국정 책임은 지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총리는 매일 벌어지는 사건과 내치를 계속 감당해야 하고 국방·외교 문제도 놓칠 수 없기 때문에 격무에 시달리는 편이다. 총리 역할이 물리적으로 힘들고 인기 없는 정책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대통령 대신 비판을 짊어져야 하는 경우도 많아 인기 유지가 어렵다. 그동안 총리를 지낸 후 대선에 출마한 경우가 세 번 있었는데 모두 다 실패했다. 그중 두 번이 시라크였다. 시라크는 총리에서 물러난 뒤 7년이 지난 95년에 와서야 비로소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다. 피용 전 총리나 알랭 쥐페 전 총리도 최근까지 크게 인기가 없었으나 지난해 11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선 1, 2위를 차지해 결선에서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프랑스식 분권형 제도에선 정부와 의회 간에도 견제와 균형이 비교적 잘 이뤄진다. 장 마리 캉바세레 전 사회당 의원은 “정부에서 어떤 법안을 꼭 통과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면 신임안을 연계해 의회 대다수가 반대하더라도 관철시키려 한다”며 “의회도 해산될 부담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하는 경우는 잘 없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선 개헌 논의가 불붙으면서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솔솔 나오고 있다. 한국은 남북 대치 상황에서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반면 한편으로는 제왕적 대통령과 같은 독재의 폐해를 오래 경험해 권력의 분산과 균형이 요구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캉바세레 전 의원은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이 국방권을 장악하고 총리가 의회와 타협해야 하니까 그런 점에서 프랑스 시스템이 한국에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제도가 비교적 성공한 비결은 의회 다수당 출신이 총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의회의 지지를 받는 총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캉바세레 전 의원은 “진짜 대통령제를 하려면 미국처럼 총리 자리를 없애야 하며 총리를 둬야 한다면 의회의 신임을 받은 사람을 임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질적으로 얼마나 권한 양도하느냐가 문제]
이에 대해 윤기석 교수는 “우리 헌법도 사실상 이원 요소가 있다”며 “책임총리제를 확실히 시행할 경우 분권형 제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프랑스와 우리의 정치문화가 달라 제도만 들여온다고 되는 것은 아니며 오래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총리에 얼마만큼의 권력을 양도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조홍식 숭실대 정치학과 교수는 “프랑스에서는 여소야대가 되는 경우에만 대통령과 총리의 분권이 이뤄진다”며 “대통령과 총리가 같은 당일 경우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대통령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야당이 다수일 때는 의원내각제, 여당이 다수일 때는 대통령제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헌법은 게임의 규칙인데 예외적인 상황에 맞춰 분권형으로 개헌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가 우리 실정에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권력을 분산하고 협치를 통한 상생의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어떤 제도가 됐든 한국 정치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꼭 되새겨봐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파리=한경환 기자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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