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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리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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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황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논문에 허위 데이터를 사용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논문) 조작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허위 데이터는 사용했지만 논문은 조작하지 않았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다. 물론 줄기세포가 '바꿔치기'됐고, 원천기술은 갖고 있다는 주장도 반복했다. 바꿔치기 부분은 검찰 수사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줄기세포 바꿔치기나 원천기술 보유 여부와 무관하게, 즉 검찰 수사와 관계없이 황 교수의 논문 조작은 이미 '학문적 범죄행위'로 판결이 내려졌다. 사이언스도 황 교수의 논문을 모조리 취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연구원들은 황 교수 곁을 떠나지 못하고 황 교수의 '억지' 기자회견에 배석했다. "황 교수가 국민에게 동정을 사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해 쇼를 했다"며 실험실의 보스에게 끌려나온 연구원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연구원들이 과학자라면, 또는 과학자를 지향한다면 황 교수와 달리 '논문 조작'이라는 명백한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면서 황 교수의 주장을 외면해야 정상인데, 그렇지 못한 것은 과학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리더십 전문가인 미국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원 진 립먼-블루먼 교수는 '독성이 강한 치명적(toxic) 리더'의 해악 중 하나로 이런 현상을 꼽는다. 치명적인 리더는 마력으로 많은 사람을 호리면서 조직과 사회에 해악을 불러오는 사람이다. "치명적 리더가 쓰고 있는 가면이 공개적으로 벗겨지기 전까지는 그의 카리스마가 지지자들의 눈을 멀게 한다"고 립먼-블루먼 교수는 지적한다. 지지자들은 치명적 리더의 명백한 결함까지 못 본 척 무시할 때가 많다는 얘기다.

그는 독성이 없던 리더가 치명적 리더로 변해가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공을 기대하기 힘든 계획, 결점이 많은 계획을 떠받치기 위해 점차 자신의 성과를 과대포장하고, 급기야 자신의 진의를 숨기게 된다는 것이다. 치명적 리더는 또 지지자들을 단결시키기 위해 외부의 적을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황 교수 사태는 아직 진행형이다. 많은 사람이 복제 개 스너피 등의 성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황 교수에게 다시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의혹이 제기된 이후 황 교수가 보여준 행태는 독성이 강한 치명적 리더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학자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우리 사회가 황 교수에 대한 미련을 하루빨리 버려야 하는 이유다. 그보다는 또 다른 치명적 리더에게 홀려 있는 것은 아닌지, 치명적 리더가 싹틀 소지는 없는지 주변을 살펴야 할 때다. 이를 위해선 리더의 카리스마에 눈멀지 않고, 사소한 잘못이라도 발견될 때마다 곧바로 그에 걸맞은 조치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

이세정 정책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