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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어 미대 못 가는 학생에 ‘꿈 사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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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무료 미술학원 차린 변호사 정보근
재능기부 강사 10여 명과 의기투합
5년간 저소득층 100명 넘게 거쳐가

정보근 변호사는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아이들의 꿈까지 가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정보근 변호사는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아이들의 꿈까지 가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작은 것부터 당장 시작하라.”

연중기획 매력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2011년 새해 아침. 정보근(39·법무법인 퍼스트) 변호사의 뇌리에 읽던 책의 한 문장이 꽂혔다. 빈곤층에 담보 없이 소액을 대출해주는 그라민은행의 설립자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무함마드 유누스의 자서전이었다. “어렴풋이 생활이 안정되고 나면 그때부터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당장 안 하면 미래에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정 변호사는 자신의 재능을 기부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문성을 살려 무료 법률 자문 등을 생각해 봤지만 그보다는 좀 더 체계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무료 음악 교육으로 의미 있는 사회 변화를 이끌어낸 미국의 ‘리틀 키즈 록’처럼 청소년들의 꿈을 키우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교육 관련 일을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대학 시절 3년간 ‘야학’을 했던 경험 때문이다. 매주 2~3일 저녁마다 서울 회기역 인근에 위치한 야학에서 노인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수학을 가르쳤었다. 정 변호사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함께 나누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해준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마침 지인을 통해 ‘미대 입시 비용이 만만치 않아 재능이 있어도 꿈도 못 꾸는 저소득층 학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미대에 가려면 매달 학원비만 50만원이 넘어요. 거기에 재료비까지 더하면 1년에 1000만원은 들죠. 아이들이 돈 때문에 꿈을 접어야 하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정 변호사는 제일 먼저 아내에게 뜻을 밝혔다. 아내는 전세자금으로 모아뒀던 500만원을 선뜻 내놨다. 이 돈을 보증금으로 조그만 사무실을 하나 얻어 미술학원 교실로 개조했다. 월세 등 사무실 운영비는 본인의 월급으로 충당했다. 퇴근 후나 휴일에는 아이들을 가르쳐 줄 재능기부자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10여 명의 동지가 모였다.

6개월가량의 준비 과정을 거쳐 2학기부터 ‘꿈꾸는 앨리’라는 미술교실을 열었다. 10여 명의 저소득층 학생을 모집해 레슨부터 재료비까지 모두 지원했다. 미대 교수부터 디자이너, 대학원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재능기부에 나섰다. 이들은 단순히 입시에 필요한 스킬을 가르치는 강사가 아니라 인생을 함께 고민하는 멘토였다.

정 변호사는 직접 학생들을 가르칠 순 없었지만 아이들의 상담부터 교실 운영에 필요한 각종 궂은일을 맡았다. “겨울에 난로에 쓸 기름이 떨어져 수시로 배달하는 일” 등이다.

지난 5년여간 ‘꿈꾸는 앨리’를 거쳐 간 학생은 약 100여 명. 이 중 일부는 미대에 진학해 자신의 꿈을 계속 키워 가고 있다. “미술에 재능이 있지만 한 번도 학원을 다녀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어요. ‘앨리’를 거쳐 미대에 간 일부 학생은 다시 재능기부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선순환이 계속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글=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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