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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사이 균형감이 더 중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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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29면

사각사각, 쓱쓱…. 연필이 종이 위를 스칠 때 나는 소리들이다. 내 빈약한 어휘력으로는 고작 연필소리를 2개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예민한 누군가는 더 다양한 소리를 언어로 옮길 수 있을 터다.


새삼 연필소리를 운운하는 건 슬슬 2017년 수첩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시내 대형서점 한가운데엔 이미 ‘2017 다이어리’ 코너가 꾸려졌다. 하지만 굳이 들여다보진 않았다. 해마다 초겨울이면 내년도 수첩 출시가 반갑지만, 그걸 사는 일은 점차 줄었다. 날짜를 기억해가며 메모할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휴대폰으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얼마 전 흥미로운 제품을 만났다. 독일의 필기구 명가 몽블랑에서 새로 선보인 ‘어그멘티드 페이퍼(augemented paper)’다. 종이에 볼펜으로 쓴 글씨와 그림을 버튼 하나로 모바일 기기에 전송할 수 있는 제품이다. 말하자면 내가 볼펜으로 종이에 글을 쓰면 손 글씨 그대로 모바일 기기에 저장된다. 또 이 손 글씨를 디지털 텍스트로도 전환할 수 있다. 이런 기능이 가능한 것은 전자유도방식과 디지털 잉크기술이 탑재됐기 때문이란다. 무엇보다 손으로 쓴 영어·독일어·러시아어·중국어·한국어 등 12개국 언어를 인식한다니 놀랍다.


지난 여름엔 노트 브랜드 명가인 몰스킨에서도 스마트 라이팅 세트를 내놓았다. 전용 애플리케이션(앱)을 내려받고 앱을 실행한 후 전용 펜의 전원을 켜면 바로 스마트폰과 연결되고, 노트에 끄적거린 내용들이 스마트폰에서 그대로 보인다. 이 놀라운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페이퍼 태블릿과 내장 카메라로 기록을 디지털화하는 스마트 펜뿐이라고 한다.


지난 몇 해 동안 태블릿PC를 사용하면서 이미 디지털 펜(스마트 펜)을 서너 종류 써 본 경험이 있다. 나무 연필 모양을 똑 닮은 53펜슬도 해외직구로 구매해 써봤지만 만족도는 많이 떨어졌다. 생긴 건 연필인 볼펜을 꼭 닮았지만 심(볼)부분이 알고 보면 빈 고무라서 꼭꼭 눌러쓰는 맛이 전혀 안 난다. 펜의 무게감도 지나치게 가벼워서 펜을 쥘 때의 손맛도 떨어졌다. 태블릿 PC 화면은 흡사 흰 노트처럼 보였지만 손바닥이 화면에 닿으면 압점의 변화 때문인지 디지털 펜이 작동을 멈춘다. 결국 손목을 들고 그림을 그려야 하니, 어찌나 불편하던지.


몽블랑과 몰스킨. 하나는 필기구의 명품이요, 하나는 노트 명품 브랜드다. 두 브랜드 모두 ‘필기’에 관해선 아날로그 문화의 클래식이요 정수였다. 그런데 이 브랜드들이 디지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화면이 아닌 종이 노트에 진짜 롤러펜을 쓰는 거라니, 이전에 디지털 펜들을 쓰며 내가 불편하게 느꼈던 것도 기능적으로 어느 정도 해결한 듯 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브랜드들의 기술력보다 균형감이 더 보기 좋다. 디지털 시대에 맞춰 회사의 역량을 디지털로만 쏟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몰스킨은 2017년 수첩을 다양한 버전으로 내놓았다. 기본 색상인 블랙과 스칼렛 레드 외에도 내년에 유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말라카이트 그린, 스틸 블루 등 6가지 색상으로 출시했다. 도라에몽·피너츠·어린왕자·배트맨 캐릭터를 활용한 한정판도 준비했다. 몽블랑도 올해가 창립 110주년인 만큼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종이노트에 연필로 글씨를 쓸 때의 아날로그적인 필기감과 갑자기 떠오른 수많은 아이디어를 보기 좋게 정리하고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디지털의 편리함. 소비자도 이 두 가지 감성과 편의성 안에서 균형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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