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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뒤떨어진 결전 병기 하나에 올인한 전략의 비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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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호 21면

1941년 5월 24일 영국의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가 퇴각하는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웨일즈를 공격 하고 있다. 독일 순양함 프린츠오이겐에서 촬영한 사진이다.[Bundesarchiv]

세계 1위는 어쩌면 피곤한 자리다. 찬사와 영광의 정점이지만 동시에 질시와 추격의 대상이자 표적이기도 하다. 모두가 끊임 없이 그의 약점을 찾고 어떻게든 무너뜨릴 순간을 노린다. 군사분야에서 이런 경쟁은 군비경쟁을 유발한다. 한 나라가 크고 좋은 무기를 만들면 곧 다른 나라가 더 나은 걸 만들어낸다. 당장 그럴 능력이 없으면 적의 최강·첨단 병기를 없애서라도 균형을 맞춰야 한다. 2차대전에서 독일 해군의 자존심이던 비스마르크함을 침몰시키려던 영국의 집착이 바로 이랬다.

비스마르크함은 당대 최강 스펙을 갖춘 배였다. 한참 뒤 일본에서 야마토급 전함을 건조할 때까지 독일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이었다. 육군과 공군처럼 1차대전 이후 사실상 해체 상태였던 독일 해군 재건의 숙원이 담겼다. 베르사이유조약으로 독일 해군은 연안해군으로 강제 축소당했다. 1차대전 때 쓰던 구형 전함 6척과 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이 전부였다. 1935년 히틀러의 재군비선언을 전후해 독일 해군은 군함 건조를 서둘렀다. 1만8000t급 순양함 애드머럴히퍼급 2척, 3만8000t급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급 2척이 잇따라 발주됐다.


마이티 후드, 탄약고 유폭으로 두 동강그 계획의 정점에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만재 배수량 5만300t에 이르는 이 함정은 빠르고 강력했다. 전함이면서도 시속 30노트(55㎞)로 달릴 수 있어 웬만한 순양함을 앞질렀다. 사정거리가 35㎞에 달하는 38㎝ 주포를 8문이나 탑재했다. 당시로선 최첨단인 탐색 레이더도 3기를 달고 있었다. 영국 해군 앞에 서면 항상 작아져야만 했던 독일 해군의 위상을 단박에 드높일 배였다. 히틀러는 물론 부국강병을 꿈꾸는 독일 수뇌부가 모두 존경했던 통일 독일의 산파,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런 염원에서였다.


1936년 함부르크에서 기공된 비스마르크함은 1939년 2월 진수돼 1940년 8월 완성됐다. 그해 말까지 바다에서의 시험항해를 마치고 출격 태세를 갖췄다. 1941년 5월 18일 비스마르크함이 순양함 프린츠오이겐을 대동한 채 폴란드 고텐하텐항구를 빠져나갔다. 독일 해군이 고대해오던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독일 함대는 발트해와 북대서양을 잇는 카데가트해협을 무사히 빠져나갔고, 5월 21일에야 노르웨이 근해에서 영국 정찰기에 발각됐다. 영국 해군엔 비상이 걸렸다. 순양함 서포크로 독일 함대를 따라붙게 하는 한편 본토 주변과 지중해 함대 소속 함정들에 집결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5월 24일 이른 아침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사이 바다에서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와 후드를 중심으로 한 영국 함대가 비스마르크를 막아섰다. 23㎞ 거리를 두고 양쪽 함대가 나란히 서서 포격을 시작했다.


승자는 독일군이었다. 비스마르크가 날린 포탄이 영국 최대 군함이던 후드의 탄약고를 직격했다. 무적 후드(마이티 후드)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영국인의 사랑을 받았던 후드는 두 동강 나며 침몰했고, 1400명의 승무원 중 단 세 명 만이 생존했다. 영국 해군의 최신예함이던 프린스오브웨일즈도 함교를 맞아 지휘부가 전멸당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고 서둘러 퇴각했다. 영국 해군의 참패였다. 비스마르크도 포탄 세발을 맞아 보일러실 일부가 침수되고 연료탱크가 새는 피해를 입었다. 작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흘러나온 기름이 배의 항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독일 함대를 지휘하던 루첸스 중장은 비스마르크를 프랑스 브레스트항으로 보내 수리하기로 했다.

1940년 기념촬영을 한 후드 승무원들. 단 3명 만이 살아남은 이듬해 비스마르크와의 전투에서 이들 중 다른 배로 전출된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가 전사했다. [HMS Hood Association Archives]

영국 해군, 모든 전력 동원해 추적 나서하지만 영국 해군에 딱히 유리해진 건 아니었다. 지중해에서 뉴펀들랜드에 이르는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전함 6척, 항모 2척, 순양함 13척, 구축함 21척이 소집됐지만 비스마르크를 따라잡기엔 속도가 느렸다. 이대로 가면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항구로 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24일 오후 10시 10분 영국 해군 항모 빅토리어스호에서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 9대가 긴급 출격했다. 이 비행기는 1936년 실전배치됐지만 1차대전의 유물로 보였다. 강철 뼈대를 천으로 감싼 날개가 두 장인 복엽기였고, 최고 시속이 230㎞에 불과했다. 조종사도 대부분 경험이 미숙한 신참이었지만 오후 11시 30분 비스마르크를 포착해 공격을 개시했다.


어이 없는 반전이 이때 일어났다. 비스마르크에 탑재된 모든 함포들이 느리게 다가오는 뇌격기를 향해 포탄을 쏘아올렸다. 주포인 38㎝포까지 동원됐다. 그럼에도 한 대도 격추하지 못했다. 대공사격을 담당하는 장교는 “적기가 너무 느려 조준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최신 전함 비스마르크의 최신 대공사격통제장치가 함정이었다. 비스마르크의 대공포들은 당시 가장 빠른 전투기의 속도인 시속 600㎞ 이상으로 움직이는 목표물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드피시는 너무 느려 조준 범위를 벗어났다. 독일군이 눈대중으로 쓸모 없는 사격을 하는 동안 9개의 어뢰가 차례로 투하됐다. 미숙한 훈련 탓에 8개는 빗나갔지만 마지막 한발이 선체에 명중했다. 이 때 생긴 피해로 속도가 잠시 떨어졌던 비스마르크는 긴급 수리로 곧 시속 50㎞를 회복해 독일 공군의 엄호가 가능한 프랑스 영해로의 항해를 계속했다.


영국은 다급해졌다. 비스마르크를 바짝 쫓던 배들은 연료부족으로 돌아설 판이었다. 거센 파도와 안개로 비스마르크의 항적을 놓치기까지 했다. 다행히 독일군이 본국에 장문의 무선보고를 하는 바람에 위치를 다시 찾았다. 영국 해군은 항모 아크로열에 탑재된 소드피시 뇌격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야 했다. 26일 오후 두 차례의 공격에서 어뢰 두 발이 명중했지만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명중한 어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회피기동을 하느라 키를 꺾은 상황에서 방향을 틀 수 없게 됐다. 물 위의 요새가 한 자리를 맴도는 손쉬운 사냥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27일 오전 로드니와 킹조지 5세 등 영국 주력함들이 비스마르크를 둘러싸고 집중 포격을 시작했다. 비스마르크의 앞쪽 포대와 브리지, 뒤쪽 포대가 차례로 강타 당했다. 루첸스 중장과 함장도 전사했다. 오전 10시 살아남은 승무원에게 퇴선명령이 내려졌다. 포탄 400발과 수많은 어뢰에 난타당한 비스마르크는 10시 40분 왼쪽으로 기울어지며 물속으로 사라졌다. 승무원 2200명 중 114명만이 구조됐다.


영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 비스마르크를 침몰시키는 데 성공했다. 자칫 흔들릴 뻔했던 영국의 제해권이 다시 확고해졌다. 반면 독일 해군은 자신감을 잃고 위축됐다. 비스마르크의 자매함인 티르피츠는 변변한 전투 한번 하지 못하고 노르웨이의 피요르드에 몸을 숨겨야 했다. 그나마 1944년 11월 영국군의 폭격으로 허무하게 최후를 맞는다.


독일 해군의 자존심인 비스마르크는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었다. 느려터진 적 전함을 만나면 전투나 회피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순양함은 강한 화력과 방어력으로 큰 피해 없이 상대할 수 있었다. 이 배가 북 대서양을 휘저으며 수송선단을 습격하는 통상파괴전에 나서는 일은 가뜩이나 U보트에 시달리고 있던 영국 입장에서는 악몽이었다. 실제로 자매함인 티르피츠가 출동한다는 소문만으로 수송함대 하나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다가 U보트에 전멸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방면에 능통한 사람을 의미하는 팔방미인은 한 가지 일에 정통하지 못하고 온갖 일에 조금씩 손대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의미도 있다. 비스마르크는 거함거포주의에서 항공모함의 시대로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대응하지 못했다.


옴니아 실패 딛고 갤럭시 성공 신화부정적인 의미에서 팔방미인의 대표가 ‘전지전능’ 옴니아 시리즈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며 스마트폰 대중화 시대를 열자 삼성전자는 2008년 옴니아, 이듬해 옴니아 II를 잇따라 내놓았다. 옴니아는 당대 최고의 하드웨어 스펙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최신 윈도모바일 운영체제(OS)를 갖추고 아이폰의 대항마를 자처했다.


하지만 PC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한 사용환경(UI) 때문에 프로그램 실행파일을 일일이 찾아 더블클릭해야 했다. 느리고 까다로운 사용방법 탓에 뭐든지 할 수 있지만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는 평도 들었다. 기존 PDA폰 사용자들은 훨씬 개선된 성능에 환호했지만 광고만 보고 처음 스마트폰을 접하는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삼성전자는 2010년 구글의 안드로이드 플랫폼과 아이폰식의 정전식 터치 인터페이스를 채용한 갤럭시 시리즈를 내놓은 후에야 애플과 경쟁할 수 있었다. 하드웨어-OS-콘텐트마켓이 맞물려 돌아가는 새로운 스마트폰 생태계에 적응하기 위해 뼈저린 대가를 치러야 했던 셈이다.


비스마르크와 옴니아의 사례는 결전 병기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전략의 한계를 보여준다. 특히 주변 상황의 변화를 무시한 채 과거의 관행만을 답습할 경우 실패의 위험성은 더 커진다. 항공 전력이 해전의 판도를 좌우한다는 것을 독일 해군이 깨달았다면 항공모함의 호위도 없이 신형 전함을 내보냈을 리가 없다. 40년 말 영국이 함재기로 이탈리아 해군의 모항인 타란토를 공습해 큰 성과를 거둔 일이 있었지만 독일 해군은 그 의미를 꿰뚫어보지 못했다.


하긴 뇌격기 덕에 비스마르크를 격침한 영국도 이듬해 항공기의 힘을 무시하고 일본으로부터 동남아를 지키기 위해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와 리펄스만 파견했다가 고스란히 격침당했으니 독일 해군의 단견만을 탓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삼성전자는 옴니아의 실패를 딛고 갤럭시를 내놓을 힘이 있었지만 나치 독일은 비스마르크를 잃은 뒤 전함을 호위할 항모 전력을 갖출 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정도의 차이일까.


나현철 논설위원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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