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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과잠’과 스카잔이 다른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1호 29면

지난 수요일 ‘서울대 과잠(대학 또는 학과별 점퍼)’이 뉴스가 됐다. 서울 강남 S고 졸업생인 서울대 학생들이 대학 교표와 출신고 교표를 양팔에 동시에 새긴 점퍼를 맞춰 입었는데, 올 들어 이런 스타일의 과잠이 10개 이상의 고교 동문으로 확대됐다는 기사다. 해당 고교는 대부분 특수목적고나 유명 자율형사립고라고 한다. 당일 네티즌 사이에선 ‘학연·지연 서열화의 표식’이라는 의견과 ‘패션·개성의 표시일 뿐’이라는 의견이 엇갈렸다.


해당기사의 네이버 뉴스 댓글에는 2191개(16일 오전 7시 기준)가 달렸고 대부분 비판적인 내용들이었다. “중학교도 새기고 초등도 새기고 집안 본관도 새기고. 그냥 이력서를 써라!”(psnl****) “소속감? 집단이기주의의 더러운 시작을 포장하는 비열한 핑계일 뿐”(rkwk****) “현대판 골품제인가? 고교까지 좋으면 성골이고, 대학만 좋으면 진골이냐?”(zimm****) “학벌, 서열… 그런 거 지긋지긋 하지 않나? 너희들이 지금 정치인들과 다를 게 뭔가?”(eung****) “겨우 옷에 글자를 표시하는 걸로 귀족적 서열을 만들고 싶어 하는 행위는 또 다른 열등감 표출방법이란 사실을 알까?”(kyun****) 등이다.


개중에는 자부심이 과시욕으로 일그러진 것을 안타까워하거나 그저 대학 새내기들의 의기투합일 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대학교 점퍼가 자기 과시욕으로 가는 것 같아 너무나 마음이 씁쓸함.”(cheo****) “그냥 재미로 만드는 거 아닌가? 고교 동문회가 의기투합해서 ‘한 번 입고 나와 보자’ 해서 만들었을 것 같은데.”(gena****) 등의 댓글이 달렸다.

공교롭게도 올봄 유행 아이템 중 하나가 ‘과잠’과 비슷한 모양의 ‘스카잔(Sukajan)’이다. 광택 있는 원단으로 만든 집업 점퍼의 가슴과 등판에 호랑이·용·꽃 등 동양적인 분위기의 화려한 자수를 장식한 것인데, 야구점퍼·항공점퍼 등과 생김이 비슷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일본을 떠나며 기념으로 군복재킷에 전통 일본 자수를 놓길 원하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름도 요코스카시의 ‘스카’와 점퍼의 일본식 줄임말인 ‘잔’이 합쳐진 것이다. 올봄에는 끌로에·발렌티노·스텔라 맥카트니·조나단 선더스 등의 2016년 리조트 컬렉션에서 여성 버전이, 생로랑·드리스 반 노튼·루이비통 등의 2016년 봄 컬렉션에서 남성 버전이 선보였다.


사실 스카잔은 우리에겐 과거의 ‘조폭’ 의상으로 친숙하다. 영화 ‘내부자들’에서도 정치깡패 안상구(이병헌)가 입고 등장했다. 소속감과 자부심의 상징인 화려한 문양과 표식. 문제의 ‘서울대 과잠’과 ‘조폭 스카잔’의 공통점이다. 다른 점은 전자는 결코 패션이 아니라는 것이다. 돈도 없고 스타일도 없던 양아치들이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청계천 뒷골목 자수 집에서 최대한 눈에 띄는 컬러와 문양을 골라 주문했던 스카잔은 유치찬란함은 있지만 적어도 타인에게 상실감을 주는 옷은 아니었다. 올봄 여러 명의 디자이너들이 선보인 2016년형 스카잔 역시 한 땀 한 땀 공들인 자수와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멋스럽다. 고가의 제품들이라 구입이 망설여지지만, 이걸 못 입는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에 주눅들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문제의 ‘서울대 과잠’은 ‘우린 이런 사람’이라고 과시하는, 학연·지연 금수저들이 스스로 붙인 로고다. 요즘 명품패션업계에선 로고가 안 보여야 더 대접받는다. ‘진짜’의 가치는 보이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는 법이다.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루이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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