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채병건의 아하, 아메리카] 미 대통령 ‘키친 캐비닛’은 비선 아닌 공인 실세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과 2015년 미국 방문 때 머물렀던 워싱턴의 숙소가 블레어 하우스다. 백악관이 미국을 찾는 해외 국빈들에게 제공하는 영빈관이 이곳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전임 대통령들이 지켰던 관례와 달리 취임식 전날 이곳에 묵지 않고 자신의 호텔에 머문다는 얘기가 나와 뉴욕타임스(NYT)가 “전통이 깨진다”고 보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재임기간 1829~37년)

미국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재임기간 1829~37년)

‘블레어의 집’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이곳의 과거 주인은 앤드루 잭슨 대통령(1829∼1837년 재임) 시절 워싱턴 정가의 실세였던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다. 그가 키친 캐비닛이다. 194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블레어 하우스를 구입해 이를 국빈 숙소로 제공하며 영빈관에 블레어의 이름이 남게 됐다.

추천 기사

잭슨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정치적 갈등에 시달렸다. 블레어 하우스의 웹사이트(www.blairhouse.org)는 “잭슨의 내각은 존 캘훈 부통령과 마틴 밴 뷰런 국무장관 간의 갈등으로 분열됐다”며 “내각이 사실상 무능력해지자 잭슨은 내각 모임을 중단하고 대신 비공식적인 지인과 자문단에 의지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키친 캐비닛이 시작됐다. 갈등이 격화되자 1831년 밴 뷰런 국무장관과 존 이튼 전쟁장관이 사임했고 잭슨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캘훈 부통령 측 장관들까지 모두 내보낸다.

잭슨 대통령의 키친 캐비닛은 이미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당대의 공인들이었다. 잭슨이 민병대 지휘관을 할 때 병참 장교였던 측근 윌리엄 루이스와, 잭슨의 조카로 비서 역할을 했던 앤드루 잭슨 도널슨(이후 프러시아 대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미국 정치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국무장관을 하다 사임했던 밴 뷰런은 잭슨의 뒤를 이어 미국의 8대 대통령이 된다. 블레어는 워싱턴의 친잭슨 신문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글로브를 발행했다. 변호사로 나중에 잭슨 정부에서 우정장관을 지내는 에이머스 켄달, 상원의원 아이작 힐, 테네시주 대법원의 전신인 테네시주 상급법원 법관 출신인 존 오버튼 등이다. 이들의 면면으로 보면 ‘작은 정부’나 다름없다.

시초는 앤드루 잭슨 때 자문그룹
변호사·법관·의원 등 작은정부급
레이건, 막역한 재계 친구들로 꾸려
NYT “모든 대통령에 비공식 조언단”
“자문해 주고 사익 챙기는 것 없어
최순실 국정 농단 스캔들과 달라”

키친 캐비닛은 이른바 페티코트 어페어(Petticoat affair)로 불리는 ‘속치마 스캔들’로 시작됐다. 유부녀와 바람을 피워 결혼까지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존 이튼을 잭슨이 전쟁장관에 앉히자 캘훈 부통령 부부와 캘훈 측 인사들이 이튼 부부를 워싱턴 사교계에서 소외시키며 잭슨파와 캘훈파로 갈렸다. 여기엔 연임을 노렸던 잭슨과 차기 대통령을 꿈꾸며 잭슨의 연임에 반대했던 캘훈 간의 정치적 갈등도 작동했다.

키친 캐비닛은 이후 대통령이라면 당연히 꾸리는 비공식 자문단이라는 의미로 바뀐다. NYT는 2007년 2월 “모든 대통령은 친구와 자문 인사들로 밀접하면서도 비공식적인 키친 캐비닛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중 로널드 레이건의 키친 캐비닛인 캘리포니아 사단이 유명하다. 레이건에게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마를 종용하고 대통령 당선까지 도운 막역한 지인 그룹이다. 이들 역시 널리 알려진 재계 인사가 다수다. 미국 편의점 체인인 월그린 소유주의 사위였던 저스틴 다트, 백화점 블루밍데일의 상속자인 앨프레드 블루밍데일, 자수성가한 자동차 판매업자였던 홈스 터틀, 쿠어스 맥주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조셉 쿠어스 등이다.

키친 캐비닛엔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을 맡은 인사도 있다. 존 F 케네디 전문가인 필립 고더티 주니어 퀴니펙대 겸임교수는 저서 『케네디의 키친 캐비닛과 평화의 추구』에서 변호사인 데드 소렌슨을 키친 캐비닛에 포함시켰다. 케네디 대통령이 “나의 지식 수혈 은행”이라 치켜세웠던 그는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할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물어라”라는 케네디의 유명한 취임 연설 작성을 도운 이다. 그런데 소렌슨은 케네디 상원의원의 공식 라인인 법률보좌관 출신이고, 케네디 정부 출범 후엔 백악관 고문으로 공조직에 편입된다.

버락 오바마 정부에선 지지층을 규합하는 유인책으로 ‘키친 캐비닛 명예 회원’이라는 증서가 등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하며 민주당에 후원하는 일반인들에게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이 증서를 보냈다. 그럼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대외 정책이 한계에 봉착했을 땐 키친 캐비닛으로부터 지혜를 구하라는 권고를 받아야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이 대패하는 2014년 중간 선거를 다섯 달 앞둔 6월 포린폴리시는 시리아 사태 등을 지적한 뒤 “(외교 분야에서) 경력이 검증된 중량급 인사에 도움이 받으라”며 “이 같은 키친 캐비닛은 제임스 존스처럼 될까 걱정할 필요 없이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조언할 수 있다”고 권고했다. 제임스 존스는 오바마의 가신 그룹들과 충돌하다 2010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서 중도 하차했던 인사다. 여기서 키친 캐비닛은 대통령이 귀를 열고 쓴 소리도 들으라는 취지다.

미국 정치학자인 션 윌런츠 프린스턴대 교수는 “잭슨 대통령이 시작해 이후 미국 대통령이 모방했던 키친 캐비닛과 불법적인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행위(influence peddling)는 명백히 다르다”고 본지에 답변했다. 월스트리트저널·블룸버그통신 등 미국 언론들은 최순실 사건을 ‘불법적 영항력 이용한 국정 농단 스캔들’이라는 표현으로 보도해 왔다. 그는 “키친 캐비닛은 비공식적으로 정기적 자문을 구하는 믿을 만한 이들로, 각료들과는 달리 정부 기관을 맡는 의무가 없는 만큼 개인적 이해 및 기관의 이해와 공익 간의 충돌 없이 솔직한 자문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윌런츠 교수는 따라서 키친 캐비닛의 전제로 “자문을 해주며 대가를 챙기는 게 없어야 하고, 사익 또는 자신들의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게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의 측근(inner circle)이 신뢰하는 인사가 정부와 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얻어 사익을 도모하는 것은 키친 캐비닛의 왜곡”이라고 지적했다. 윌런츠 교수는 잭슨 대통령을 조명한 책인 『앤드루 잭슨』의 저자다.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