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티은행의 '계좌유지수수료'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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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의 은행 계좌는 이자를 주기는커녕 매월 수수료를 뗀다? 한국씨티은행이 계좌유지수수료 도입이라는 새로운 실험에 나선다. 미국 은행에선 일반적이지만 한국 은행권에선 낯선 제도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한국씨티은행은 계좌유지수수료를 새로 도입하는 내용의 약관 개정이 최근 금융감독원 심사를 통과했다고 21일 밝혔다. 이르면 내년 3월부터 전체 거래잔액(예금·신탁·방카슈랑스·투자상품 합계)이 1000만원 미만인 신규 고객을 대상으로 매월 계좌유지수수료를 부과하게 된다. 수수료는 월 3000원에서 5000원 사이로 결정할 예정이다.

이 은행은 자유입출금식 통장에 매기는 이자율이 0.01%(잔액 1억원 미만)로 시중은행 중 가장 낮다. 1000만원을 1년간 넣어둬도 연간 이자가 세전 기준으로 고작 1000원이다. 월 3000~5000원의 계좌유지수수료는 고객에 따라서는 적지 않은 부담일 수 있다.

고객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존 거래 고객은 수수료를 면제키로 했다. 씨티은행 계좌가 없더라도 씨티카드 등 거래내용이 있으면 기존 고객으로 분류한다. 창구에 방문하지 않고 인터넷ㆍ모바일뱅킹이나 자동화기기(ATM)만 이용하는 경우엔 그달의 수수료를 면제해준다.

인터넷·모바일뱅킹이 어려울 수 있는 만 60세 이상 또는 만 19세 미만 고객엔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씨티은행 관계자는 “단순히 수수료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계좌유지수수료를 부과하는 게 아니다”며 “인터넷뱅킹이나 자동화기기 등을 통한 비대면 거래를 활성화해 직원들의 역량을 고객의 자산관리에 쏟을 수 있게 하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거래금액 1000만원 미만인 고객이 지점에 찾아오면 직원이 ‘계좌유지수수료가 부과된다’고 미리 안내해주기 때문에 고객들이 비대면 방식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씨티은행은 최근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자산관리서비스를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계좌유지수수료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란 설명이다.

계좌유지수수료 도입이 국내 은행 중 처음은 아니다. 제일은행은 2001년 1월 월간 평균잔액이 10만원 미만인 고객에게 매달 2000원씩 계좌유지수수료를 떼는 제도를 은행권 최초로 도입했다. 다른 시중은행들이 이를 따라서 일제히 계좌유지수수료 도입을 검토하고 나섰을 정도로 은행권이 관심이 컸다. 하지만 실제 따라한 은행은 없었다. 소비자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은행이 이익에 눈이 멀었다”는 비판과 “소액 예금자 차별”이라는 항의가 이어졌고 이탈하는 고객들이 늘었다. 결국 제일은행은 도입 3년 반 만에 이를 폐지했다.

미국의 상업은행은 대부분 계좌유지수수료를 운영한다. 입출금이 자유롭고 이자율이 연 0.01%인 체킹어카운트의 경우 잔액이 1만~1만5000달러(약 1200만~1800만원) 미만이면 계좌유지수수료가 월 25달러(약 3만원)에 달한다(씨티은행, JP모건체이스 등). 하지만 미국의 이 제도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수표발행이 가능한 미국의 체킹어카운트와 한국의 자유입출금식 보통예금은 상품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은행권에선 씨티은행의 시도가 통할지 주목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실제로 계좌유지수수료 도입으로 인해 비대면 거래 비중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지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계좌이동제로 언제든지 주거래은행을 쉽게 옮길 수 있는 상황에서 다른 은행들이 이를 따라가긴 어려울 거란 전망도 나온다. 송치훈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씨티은행은 나머지 은행과는 다른 노선(고소득층 자산관리에 집중)이어서 계좌유지수수료를 도입한 것”이라며 “다른 시중은행은 굳이 이를 따라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소비자단체는 씨티은행의 계획에 반기를 들 기세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가뜩이나 서민들이 살기가 팍팍한데 돈이 적다고 수수료까지 떼는 건 은행의 무리한 요구”라며 “미국과는 다른 한국적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비자단체들과 협의해서 계좌유지수수료 도입 철회를 요구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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