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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 예방한다며 때린 적 있느냐고 묻는 ‘체크 리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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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유아를 때리거나 신체적 고통을 가한 적이 있다” “도구를 이용해 유아를 위협한 적이 있다.”

교육부, 내년 초 전국 유치원에 보급
전문가 “과거 학대 경험만 물어봐
잠재적 가해자 찾기 불가능할 것”
정부선 “직원에게 경각심 줄 것”

교육부가 내년 초 전국 유치원에 보급할 ‘유치원 교직원용 아동권리 보호 자가체크 리스트’에 들어 있는 항목 중 일부다. 지난 14일 공개된 이 리스트는 모두 15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 유아들을 괴롭히거나 왕따시키거나 소홀히 대한 경험이 있는지 여부를 묻는 내용들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유치원 교직원들이 스스로 자신이 가해자가 될 소지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원장이나 다른 교사들이 서로 모니터하기 위한 차원에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체크 리스트 작성은 외부의 아동전문보호기관에서 담당했으며 용역비는 3000만원이 투입됐다.

그러나 이러한 체크 리스트 항목이 당초 목표대로 아동학대를 줄이거나 예방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본지가 의사·전문가·교직원 등 10명에게 체크 리스트 항목의 분석을 의뢰한 결과 10명 중 9명이 “교육현장에서 전혀 활용되지 않을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분석에 참여한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항목을 처음 봤을 때 유치원 교사에게 익명으로 아동학대 경험을 묻는 문항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가체크 리스트는 한 개인이 아동학대, 왕따의 가해자가 되기 전에 위험 요인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지 파악해 사전 예방 차원에서 실시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교육부의 체크 리스트는 과거 학대 경험만 묻고 있어 잠재적 가해자를 찾아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제대로 현장에서 활용되려면 ‘유아를 때리거나 신체에 고통을 가한 적이 있다’는 문항 대신 ‘말을 안 듣는 아이를 때리고 싶다는 충동이 하루에도 세 번 이상 든다’로, ‘유아에 대한 기본적인 보호와 돌봄을 소홀히 한 적이 있다’는 문항은 ‘유치원이 끝나고 집에 가면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때가 있다’는 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의진 연세대 정신의학과 교수도 “잠재적인 위험을 찾아낼 수 없는 항목만으로 구성돼 있어 아동학대 예방에는 활용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체크 리스트가 지나치게 아동학대에만 초점이 맞춰져 정작 아동권리 보호는 뒷전으로 밀렸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선아 숙명여대 아동복지학부 교수는 “아동에게는 생존권·보호권·발달권·참여권 등 다양한 권리가 있다”며 “학대만 살피지 말고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교육하는지 등을 세세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학대에만 맞춘 체크 리스트는 자칫 교사에게 ‘리스트에 나온 문제 행동만 피하면 된다’는 식의 잘못된 인식을 줄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교육부 측은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지만 유치원 현장에서는 왕따·위협·차별과 같은 행위를 여전히 교육 행위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며 “체크 리스트가 교직원에게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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