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도려내는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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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즈음 고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을 경찰이 축소은폐하려한 일로 신문의 사회·정치면이 연일 넘쳐나고 있다. 방송도 전에 없이 성의를 보이려고 애쓰며 천금같은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한다. 진작부터 이체제의 불의와 부조리에 불같은 필봉을 휘둘러온 이들의 질책과 성토는 그 어느때보다 드높고, 그 해박한 지식과 깊이있는 사고로 늘 이사회를 나무라고 꾸짖어온 이들은 이제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개탄만 내쏟고 있다.
하지만 숭어가 튀니까 망둥이도 따라 뛴다는 식으로 남 다 떠드는걸 보고 덩달아 나서려고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다. 없던 용기가 갑자기 솟았거나 하루아침에 신조가 바뀐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터무니 없이 엇금놓아 은근슬쩍 어느쪽을 편들려고 나선 것은 더욱 아니다. 말과 논리의 홍수속에도 어딘가 빠진듯한 구석이 있어 감히 이글을 쓴다.
신문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보도를 빼면 대체로 지면은 이왕에도 용기있는 지성, 행동하는 양심들로 자처해온 이들에게만 할애된듯한 인상이다.
자칫 현체제의 동조자 또는 반동으로 몰리게되는 격앙된 현실에 겁을 먹은 그들이 이번에도 입을 다문탓일까, 아니면 이번 사건으로 할말이 없어졌거나 그들의 발언내용이 그것으로 한몫 보려는 센세이셔널리즘에 맞지 않아 언론이 지면에 인색해진 탓일까.
그렇지만 이번 사건으로 정부와 여당이 가장 몹쓸짓을한 것은 바로 그들에게다. 조금씩이라도 개선되고 진보되는 것을 큰 기쁨과 위로로 여기며, 불안한대로 자신의 선택을 옹호해오던 그들에게 이번 사건은 커다란 충격과 아울러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더는 이사람들을 믿고 맡겨서는 안되겠고, 못본체하거나 쉽게 잊어주어서는 안되겠다-그들은 거의가 그런 다짐으로 스스로를 단속했을 것이고, 더러는 공범의식으로 괴로와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글이 씌어지는 입장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와 여당도 이번만은 팔걷고 나서고 있거니와, 또다시 어떤 축소나 은폐의 음모가 통할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기회를 빌어 다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번사건의 전번발표때처럼 의심스러운데도 그냥 받아들이기로한 몇가지 사건들이다.
이미 해를 남겼고 사건도 일단락된 것들은 제쳐놓더라도 우리가 따져볼 사건은 둘이나 된다. 올들어 터졌고 아직은 수사중이거나 공판계류중인 부산복지원사건과 범양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부산복지원 사건에서 우리가 가장 의심한것은 그 사건의 핵심인물인 박씨로 하여금 그토록 당당하고 배포좋게 나올수 있게하는 힘의 정체다.
수십명의 죽음에 대해 직접이든 간접이든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엄청난 혐의와 수십억의 국고보조를 횡령했다는, 또한 적지 않은 죄의 혐의를 받고 구속된 그가 여전히 복지원의 실권을 잡고 두번 세번 물의를 일으킬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비호와 무엇을 믿었던 결과일까.
또다른 살인사건이 나고 집단탈출소동이 있어도 경영권은 여전히 가족과 친지를 통해 그의 손에 있고, 감옥살이마저 바깥사람들에게도 호사스런 안마시술소까지 출입하는 그런 것이 될수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인가.
세번째 물의에 대해서 당국의 발표는 피의자가족들의 뇌물을 받은 말단 경찰관의 직무유기라 하고 있지만, 우리 상식으로는 그런 근무자들 만큼 눈치빠른 사람들도 없다. 당국이 불의를 척결하려는 단호한 의지로 엄중한 문초들 진행하는 눈치가 있었다면, 그 경찰관은 설령 신문에 발표된 액수(60만원상당)의 열배가 되는 뇌물을 받았더라도 자신의 목을 내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경찰관으로 하여금 발표된 것과 같은 행동으로 감히 나아가게한 판단의 근거는 밝혀져야한다. 아무리 이나라 국회의원의 값이 땅에 떨어졌다지만 명색 국회의원들이 단(단)을 이루어 들어오는 걸 실력으로 저지한 대전의 또다른 용감한 복지원장이 믿었던 힘과함께.
얼마전에 수사가 일단락된 범양사건도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믿어주려해도 정히 믿어지지 않는게 두군데 있다. 그 하나는 수백억의 부정축재가 있고, 몇조란 빚을 국민에게 떠넘기게될 위험이 있으며, 또 백억이 넘는 비자금이 오락가락했는데, 이나라의 공무원은 귀떨어진 지전 한장 얻어쓴 적이 없다는 그 감격할만한 청렴도이다. 국민들은 너무 감격해 어이없어 하고 있음을 당국자는 잘 알아주기 바란다.
다른 하나는 김희평여인이다. 그녀의 행적과 호칭에 대한 한동안의 신문보도는(주간지 포함) 소설적인 흥미까지 일으킬 만큼 요란스러웠다. 그런데도 당국의 발표는 구속은 커녕 입건할 여지조차 없는 평범한 주부였다. 먼저 김희평여인에게 권한다. 만약 그 발표가 사실이라면 이나라의 황색언론은 마땅히 철퇴를 맞아야 한다. 그들을 고소하여 잃은 명예와 그동안 방은 정신적인 고통을 보상받기를.
지금 이 정부와 여당에 시급한 것은 신뢰도의 회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처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있는대로 드러내 보이고 용기있게 도려내 그 아픔을 국민과 함께 하는데서 온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섣부른 은폐는 오히려 불의의 기억을 더욱 키우고 오래가게 하는 법이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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