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양은 한사장이 망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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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범양을 망친 것은 전적으로 한사장의 탐욕과 독선, 오판입니다. 그가 「경영의 귀재」라는 것은 크게 잘못된 얘깁니다. 박회장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그의 고집스런 철학 때문에 호랑이를 키워 화를 부른 셈이에요.』
범양분규의 1라운드, 이른바 「8인방 사건」의 주동자K모씨(42)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82년 사건당시 회사의 중견간부로 「회사를 살리기 위해」한사장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오히려 박회장으로부터 「하극상」이란 질책을 듣고 끝내는 회사를 떠나야했던 K씨는 23일밤 자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이체는 얘기할 수 있다』며 범양분규의 전말을 털어놨다.
『한사장은「경영의 귀재」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여러 차례 엉뚱한 판단착오로 회사를 재정위기에 빠뜨리게 한 장본인입니다.』
한사장의 첫 중대오판은 76년 정부가 조선사업 육성의 일환으로 추진한 제1차 「계획조선사업」참여에서 저질러졌다. 한사장은 범양의 재정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H조선측에 4척의 벌크선(당시 5천만달러 상당)을 주문, 심각한 자금난을 초래했고 해운불황까지 겹쳐 범양은 첫 시련을 맞았다.
당시 자금 및 기획담당상무로 일을 주도했던 한씨는 임원들로부터 이의 책임을 추궁받자 76년4욀 돌연 회사에 사표를 내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잠적, 77년 말까지 1년여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나 박회장으로부터 절대신임을 얻고있던 한씨는 다시 박회장의 부름을 받고는 귀국조건으로 대담하게 사장직을 요구, 다음해인 78년1월 사창으로 복귀했다.
『사장이 됨에 따라 이전의 상급임원들이 모두 방계회사등으로 밀려나는 수난을 겪게됐고 이때부터 그의 독주가 시작된 겁니다.』 K씨는 이때 이미 박희장은 자신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고 술회한다.
사장이 된 한씨는 이후 끊임없이 사업확장에 손을 댔으나 다시 두 차례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해운호황의 끝 무렵인 80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시에 곡물저장 하역소(Grain Elevator))를 사들여 곡물중개·운송업을 계획했다가 내륙수송을 위한 철도시설경비가 많이 들자 석탄운송·판매업까지 손을 댔던 것.
당시 이 사업은 현지 TV에 방영되고 미 상원의원이 교섭을 위해 방한하는 등 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화력발전을 위해 석탄을 공급받기로 한 한국전력 측이 『미국 서부탄은 수분함량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바람에 수개월간에 걸친 법석 끝에 착수단계에서 쇼로 끝나고 말았다.
『당초부터 중역들로부터 수익성이 적다고 반대를 받았으나 끝까지 고집을 부린 이유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뒤늦게 미국에 거주 중이던 자신의 친동생(48)에게 거액의 공사를 맡겨 「한탕 안기려는」의도였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한씨의 세번째 결정적 실수는 79년 말 정부의 「국적선적취비율 50%인상계획」에 따라 중고 벌크선을 최고시세에 7척이나 사들인 것. 박회장은 이때도 중고선 도입을 반대했으나 정부시책을 등에 업고 한사장이 고집을 세워 밀고 나갔다. 그러나 뒤이어 닥친 해운불황이 장기화되면서 범양은 눈덩이처럼 빚이 불어나 끝내 부실의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쯤 한사장은 「범양의 전제군주」가 되어있었다.
『한사장은 이 무렵부터 회장에 대한 의사전달을 중역들조차도 모두 자신을 통해하게 하는 등 희사경영의 전권을 장악했고 결재서류가 마음에 안들면 고함과 함께 집어던지고 중역들에게 「집에 가 애나 보라」고 공개석상에서 면박을 줄 정도로 안하무인의 폭군이 됐습니다]
한사장은 심지어 「회장님지시」라며 들고 간 결재서류도 『××같은 게 뭘 알아』하고 밀쳐버렸고 회장이 참석하는 시무식·종무식에 불참한 채 내연의 처와 외유를 나섰다는 것이다.
더 이상 가면 회사가 위태로와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사내에 팽배한 가운데 일부 중역·소장간부 등 8명이 회합을 갖고 구사를 위해 사장퇴진을 회장에게 요구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한사장의 마수를 헤아리지 못한 박회장은 거꾸로 이들 「8인방」을 질책했고 끝내는 8명이 회사를 떠나야했다.
『한사장은 당시 우리들의 퇴진요구에 대해 「경영자의 임용과 해임은 소유주만의 권한이며, 아랫사람들의 요구는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중대한 하극상」이란 묘한 논리로 우리를 매도했었죠.』
K씨는 『그때 박회장이 소강간부들의 「충정」을 바로 헤아렸더라면 오늘의 비극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 이라며 말을 맺었다. <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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