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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로 피의자 꼼짝 못하게 만드는 ‘고뇌하는 칼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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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윤석열

2013년 10월 24일 경기도 여주시 현암동 여주지청 앞 주차장.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자에게 윤석열 여주지청장의 전화가 왔다.

돌아온 윤석열 특검 수사팀장

“건물 뒷문 살짝 열어줄 테니 차나 한 잔 하고 가소.”

청사 현관 앞에는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던 때였다. 방호원들은 “지청장께서 추운데 고생들 하시지 말고 돌아가시라 하셨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불과 3일 전. 윤석열(56·사법연수원 23기) 당시 여주지청장은 직속상관인 조영곤(58·16기) 서울중앙지검장과 정면 충돌했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특별수사팀을 이끌던 윤 지청장은 10월 18일 수사팀에서 전격 배제됐다. 조 지검장의 재가(裁可) 없이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해 발부받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소장 변경 신청서를 법원에 접수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사흘 뒤 국감장에서 윤 지청장은 ‘작심 발언’을 이어갔다. 수사 초기부터 법무·검찰 수뇌부의 외압이 있었고 체포영장 청구와 공소장 변경은 적법한 절차를 따랐다고 주장했다. 상관의 위법한 지시를 따를 수 없었다고도 했다.

청사 뒤로 돌아가자 검찰 직원 한 명이 잠겨 있던 철문을 열어줬다. 안내를 받아 지청장실로 올라갔다. 해질녘 지청장실 창문 밖으론 남한강과 멀리 여주보(洑)가 한눈에 보였다. 소파에 몸을 기댄 윤 지청장은 “난 모르는 일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밝혀진 범죄 사실을 기소하는 게 검사의 책무라고도 했다. 그는 “공개된 장소에서 상관을 공격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 난들 괴롭지 않았겠나. 하지만 법이 위임한 검찰권을 행사함에 있어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지청장실을 나서는 등 뒤로 윤 지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청사에 있을 테니 기자들 모두 돌아가시라 해라. 저녁 바람이 차다.”

윤 지청장은 그해 12월 법무부 검사징계위원회에서 정직 1개월, 감봉 1개월의 징계처분을 받았다. 대검찰청 중앙수사 1·2과장,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등 엘리트 ‘특수통’ 검사의 길을 걷던 그는 이후 3년간 대구고검·대전고검 등 한직을 떠돌았다. 국정원 특별수사팀 부팀장으로 호흡을 맞췄던 박형철(48·25기) 검사가 좌천성 인사 끝에 올해 초 옷을 벗었지만 그는 끝내 검찰에 남았다. 윤 검사는 “국정원 사건의 최종심 결과가 나오면 검찰을 떠나겠다”고 했다.

그를 다시 세상에 끌어낸 건 박영수 최순실씨 국정 농단 사건 특별검사다. 박 특검은 그를 검찰에 수사팀장으로 요청하면서 “수사를 잘하는 합리적인 검사”라고 평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 이후 보수층에선 윤 검사를 ‘좌파·친야당’ 검사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우리나라 보수 평균보다 약간 더 오른쪽에 가 있는 성향’이라고 평가한다. 윤 검사 스스로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전까지 한겨레·경향신문 같은 이른바 진보 매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대선자금 수사, 변양균·신정아 수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의 미국 고급 아파트 매입 의혹 수사 등 야권 인사들과 악연이 더 많다는 시각도 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굳이 이념적 성향을 따지자면 ‘진짜 보수’쯤 된다. 하지만 수사를 할 때만큼은 이념도 정무적 판단도 없다. 권력에 굽히지 않고 법의 잣대로만 수사하는 검사다”고 평했다.

그의 대학 동기이자 검찰 선배였던 석동현 변호사는 그를 일컬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검사’라고 했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수사에 착수하기 전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고 신중하게 판단한다는 의미다. 석 변호사는 “그가 판단한 것은 열 중 아홉은 무조건 신뢰할 수 있다. ‘특수통’이라 불리는 이들 중엔 미리 결론을 내리고 무식하게 돌진만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윤 검사는 정확한 판단을 내린 뒤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검찰 출신 변호사도 “피의자를 협박하거나 모멸감을 주는 특수통 검사가 많지만 윤 검사는 철저한 증거로 피의자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라며 “안대희의 돌파력과 최재경의 부드러움을 모두 지닌 ‘고뇌하는 칼잡이’”라고 말했다.

서울 출신으로 충암고를 졸업한 윤 검사는 서울대 법대 79학번이다. 김수남(16기) 검찰총장을 비롯해 5명의 검사장이 같은 곳에서 같은 학번으로 공부했다. 선두주자였던 남기춘(15기) 전 서울서부지검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윤 검사의 ‘절친’이다. 강골(强骨)에 특수통인 점도 비슷하다. 석동현(15기) 전 서울동부지검장, 김영준(18기) 전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도 대학 동기다.

윤 검사는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 1차에 붙었지만 2차 시험 운이 좋지 않았다. 9수 끝에 1991년에 합격했다.

주변 인물들은 그를 논리에 강하고 박식하며 정의감이 투철한 인물로 기억한다. 대학 재학 시절 김찬경(60·수감)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서울대 법대생을 사칭하다 들통나자 남기춘 전 지검장과 함께 김 전 회장을 잡으러 신림동을 뒤졌다는 일화도 있다.

검찰을 한 번 떠났다가 돌아온 만큼 검찰 조직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2013년 국정감사 때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은 윤 검사에게 “조직을 사랑하느냐”고 추궁했다. 윤 검사는 “대단히 사랑한다. 하지만 사람에 충성하지는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윤 검사는 지난 1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국정원 수사 이후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사건은 진저리가 나 (박영수 특검의) 참여 요청을 고사했다. 최순실 사건은 뉴스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역린’을 건드렸던 그는 특검의 수사팀장으로 피의자 박근혜 대통령의 혐의를 파헤쳐야 한다. ‘고뇌하는 칼잡이’ 윤석열에게 국민의 이목이 쏠려 있다.

이동현·서준석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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