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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생일선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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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월7일 하오3시5분. 일본돗토리(조취) 현 미호 (미보) 기지. 우리가족 11명을 태운 해상보안청소속 YS-11기가 활주로를 이륙했다. 쓰루가항에서 선실유폐생활을 한지 17일째 되는 날이었다.
하오7시30분. YS-11기는 자유중국 대북 중정국제공항에 착륙했고 다음날인 8일 하오7시30분 우리가족은 대한항공 보잉727기에 탐승, 자유중국을 떠나 서울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숨가쁜 일정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신문사기자들의 열띤 취재경쟁을 보았을때, 그리고 첫 서울나들이에서 우리가족을 따뜻이 환영해 주는 시민들의 밝은 표정을 보았을 때 나는 그동안의 불안이 한낱 기우였음을 느꼈다.
자유인이 된지 3개월-. 누가 서울생활의 소감을 묻는다면 무엇보다 서울에는 김일성과 같은 엉터리우상이 없어서 좋다고 말하고 싶다.
김일성우상화는 북한주민들의 생활 그 자체다. 김일성의 생일은 4월15일.
매년 생일때가 되면 도인민위원회는 각 기업소 (공장) 에 김에게 현납할 생일선물 준비를 강요한다.
정력에 좋다는 사향노루배꼽·산천어·산삼등 희귀품목을 기업소별로 배당해 마련토록하는 것이다.
탈출직전까지 내가 소속돼있던 함경북도 자원보호감독대는 산천어를 생일선물로 헌납하곤 했다.
인민위원회 간부들은 생일선물로 1백마리가 필요하면 1천마리를 요구한다. 중간에서 도당간부가 떼먹고, 중앙당간부가 뜯어먹을 몫까지 요구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북한은 당간부들의 천국이다.
『산놈 (활어) 으로 1천마리를 잡아라』 -이같은 지시가 떨어지면 기업소별로 10여명씩 조를 짜서 산천어잡이에 나섰다.
산천어의 서식처는 파율시 어명산 해발6백미터의 골짜기.
우리는 차디찬 계곡물속에 발을 담그고 그물을 쳐 산천어를 잡아야했다. 이 기간중은 아예 어명골 벌막(꿀벌치기위해 만든 움집)에서 2∼3일씩 합숙을 해야한다.
사슴피처럼 산천어의 피도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나있다. 우리는 그물에 걸린 산천어중 산놈을 골라 버드나무로 짠 버들함속에 집어넣는 작업도 했다. 이 작업을 할때면 감독의 눈을 피해 산놈을 돌팔매쳐 일부러 죽여 피를 마시고 매운탕을 끓여먹기도 했다. 우리가 한몫을 찾을수 있는 방법은 이뿐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우상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작업은 해방 직후부터 서서히 이루어졌다. 「일제하 만주의 독립군은 파벌싸움만 일삼았다. 이때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이 나타나 항일빨치산을 조직했다.」
「김일성장군의 항일빨치산은 장백산을 중심으로 동만주 지역에서 15여성상 눈보라를 헤치며 투쟁한 끝에 소련군과 힘을 합쳐 조국을 해방시켰다」 「김일성장군이 축지법을 썼다」등등 허무맹랑한 역사의 날조가 이루어졌다.
50년대 초부터는 김일성의 칭호가 「장군」에서 「원수」로 바뀌고 독립투쟁경력 「15여성상」이 「20여성상」으로 고무줄처럼 늘었다. 「소련군과 힘을 합쳐…」는 간곳이 없고 「영명하신 김일성장군의 힘만으로 조국독립이 이루어진것」으로 둔갑했다.
휴전후는 더욱 가관이었다. 「미제와 16개추종국가 군대가 북조선을 공격했지만 김일성원수님의 영활한 전술로 전쟁은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났다」고 떠들어댔다.
이때는 소련대신 중공에 추파를 보냈다. 조선인민군을 지원했던 「중공인민지원군」을 「항미원조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피로써 맺어진 조중」 「조중인민의 영원한 친선단결만세」를 외치며 애교(?)를 부렸다.
아마 세계에서 북한처럼 동상문화가 발달된 나라는 없으리라.
14살짜리 소년김일성이 「조국의 해방을 보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검은 두루마기에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눈보라속 두만강을 건너는 모습, 아들 김정일과 저택에서 걸어나오면서 혁명사업을 구상하는 모습등을 조각한 동상이 우뚝 우뚝 서있다.
함북 온성군의 왕재산 사적지건설사업소는 김일성의 동상·사적지·혁명탑·기념관만을 전문으로 제작 건설하는 기업소다. 노동자가 1만명을 헤아리는 1급기업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한번 방문했던 집은 「위대한 수령동지께서 머물렀던 사적지」가 된다. 집주인은 당연히 집을 비우고 주위에 나무를 심고 청소를 하며 법석을 떤다.
김일성이 각기업소 방문때 손을 한번 잡아준 사람이나, 『동무, 수고가 많소』하고 어깨를 두들겨준 사람은 영광의 「접견자」명단에 오른다. 뒤따르던 기업소 간부들이 『동무 이름이 뭐요』 하며 「접견자」 명단에 기록, 특별휴가를 보내는등 특혜를 주는 것이다.
동생의 「김일성초상화모독사건」이후 나는 성분불량자로 찍혔기 때문에 접견은 고사하고 환영도 못했다.
서울생활소감을 한마디만 더하라면 나는 서울사람들이 너무도 북한의 실상을 모른다는 점을 말하고싶다.
서울시민들은 내가 『북한에서는 이밥(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말하면 대부분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럴때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 얘기 또한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서울의 호텔에서 첫날밤을 맞았을때 수세식화장실 사용법을 몰라 당황했었다.
북한의 주택은 공동주택이다. 방2칸, 부엌1칸씩을 하모니카처럼 엮어놓았다. 인민반 (30가구)마다 설치된 화장실은 겨우 2칸. 물론 재래식이다. 30가구 1백50여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이 2칸뿐이니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 아니다.
목욕탕 사정도 한심하기 이를데없다.
청진시내에는 각구역별(인구5만∼10만) 로 공동목욕탕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연료사정 때문에 대부분 개점휴업상태다. 1주일에 한번(일요일) 문을 여는데 그날이면 목욕탕은 콩나물시루가 된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목욕탕사용을 아예 포기하고 집에서 가마솥에 물을 끓여 몸을 씻는다.
생필품 공급사정도 엉망이다. 세탁비누의 공급량은 연간 5장. 6개월도 채못돼 바닥이 난다. 주민들은 아직도 명태·정어리기름등에 가성소다를 섞고 이를 끓여 비누를 만들어 쓴다. 이때문에 주민들의 옷에는 항상 쾌쾌한 비린내가 배어있다.
그러나 당간부들은 사겅이 다르다. 북한에는 「8·9호제품생산기업소」가 있다. 당간부들에게 특별공급하는 식품·피복·생필품등을 전문생산하는 공장을 말한다. 또 이 기업소 노동자만을 특별검진하는 「8·9호검진대」란 것도있다. ·
북한에서도 각 기업소·협동농장별로 노동자 건강검진을 실시한다. 물론 대부분 형식적인 검진에 그친다. 그러나 「8·9호제품생산기업소」는 다르다. 도당위원회직속으로 대학병원수준급의사로 구성된 8·9호특별검진대를 조직, 3개월에 1회씩 정밀검진을 실시한다.
조선노동당이 떠들어대는 계급없는 평등사회는 허황한 구호일 따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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