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 갖다줄 사람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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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신병리학자가 오늘의 한국신문을 진단한다면 아마도 마조히 보게될지도 모른다.
언론사의 창간일이다, 신문의 날이다 하는 무슨 잔치 마당에는 으례 신문마다 언론자유의 회복이 시급하다는 볼멘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러한 소리를 들어보면 난시청석에 앉아 있는 독자조차도 요즈음 신문이 외부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씹히고 학대를 받고 있는가 보다 하고 짐작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나라 언론기업은 지금 한국의 신문사상 공전의 대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문사마다 신축 사옥의 빌딩은 치솟아 오르고, 수습기자를 모집한다고 하면 수백대1의 경쟁시험 응시자로 그 문앞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제도언론이 그 막대한 정치적 위력과 경제적 실력, 그 막중한 사회적 위신파 문화적 실권을 가지고도 스스로의 자유를 스스로 쟁취하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의 어디에도 언론인을 대신해서 언론자유를 찾아다 신문에 선사해 줄 수 있는 힘은 없다.
흑막에 가린 사건들의「진상」도 신문이 스스로 밝혀 내거나, 적어도 밝혀보려고 안간힘을 다해야 된다.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당국을 향해, 그리고 아무 힘도 없는 독자들을 향해 신문이『진상을 밝히라』는 구호만 되뇐다는 것은 안일한 알리바이주의의 또 다른 보기에 불과하다.
모든 사건의 진상은 그 사건에 관련된 이해 당사자나 그에 개입한 권력이 밝히기를 꺼리고 숨기려 하는 것이 상례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파헤칠 중립적·객관적 제3자로서 신문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흑막에 가린 진상을 밝혀 독자에게 알러주는 것이 신문의 가장 중요한 소임이라고 하는 보도기능이다.
지난 겨울의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이 남겨준 귀중한 교훈은 권력이 개재된 사건의 진상은 오직 언론이 이를 밝히려 노력할 때 비로소 밝힐 수가 있고, 또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언론은 언론인 스스로 비하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무력한 존재는 결코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권력은 집권자들이 자만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것은 못된다. 무엇보다 권력은 시한부의 수명을 누리고 있지만 언론에는 임기 제한이라는 것이 없다.
다원적인 정보의 통로가 어쩔수 없이 이미 개방되어 있는 소위 국제화 시대·정보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처렴 개명된 세상에 고작 제도언론의 입만 틀어막는다고 해서 정보의 흐름이 잡혔다고 착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밥주걱으로 햇빛을 다 가렸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깃이다.
만일 신문의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히고, 입에 재갈이 물려진다고 치자. 그로 해서 독자들이 신문을 불신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신문만의 불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신문을 불신한다는 것은 곧 정부를 불신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제도언론에 대한 불신은 바로 정치제도 그 자체에 대한불신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신문이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매질을 당하고 학대를 받으면서 재미를 본다는 것은 도착된 현상이다.
매는 신문이 얻어맞기 위해서있는 것이 아니다. 매는 신문이 정부를 때리고 꾸짖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신문의 가장
중요한 또 다른 소임인 비판기능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부가 신문을 매질하면 민주주의가 시든다. 그 대신 신문이 정부를 매질하면 민주주의가 살아난다. 그 어느 족이 바른 신문, 밝은 사회로 가는 길인가.
내년이면 세계인의 잔치라고 하는 88올림픽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된다. 우리는 그때 이 땅에 찾아오는 세계 사람들 앞에「정부의 매를 맞는 신문」과「신문의 매를 맞는 정부」의 어느 쪽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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