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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오늘의 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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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법부의 독립과 존엄성에 대한 회의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법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법관이나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물론 시정의 일반생활인들 사이에서도 우리의 사법부가 과연 얼마나 독립해서 존염하게 존재하는가에 적잖은 의구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최근 몇년 사이, 이른바「시국사건」의 재판이 크게 늘어나 국민들의 주목 속에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법부는 역설적으로 신뢰의 기반을 굳혀가기는 커녕 갈수록 그 존엄성과 권위를 훼손당하는 인상을 짙게 해왔다.
공판장마다 터져 나오는 법과 재판에 대한 권위 부정의 행동들은 단편적인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연속적인 사태로 확산돼「사법의 위기」가 결코 과장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요즘이다.
법조계의 원로인 이돈명변호사나, 법과는 또 다른 규범의 전도자인 문전환목사가『이 법정은 나에게 유죄를 선고했지만 역사는 나에게 무죄판결을 내릴 것』이라며 더 이상의 사법 심사를 포기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공판장에서 노골적인 야유를 퍼붓고 재판장에 대한 욕설과 함께 고무신까지 벗어 던지고 심지어 법대 위를 뛰어오르는 대학생 피고인들의 태도에서도 오늘의 사법부가 처한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재판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재판의 결과가 국민들에 대해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법관의 입을 통해 나온 판결이 평균적인 상식에 어긋난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그러한 판결이 자꾸만 누적된다면 사법부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은 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이 권위를 상실하면 빛이 밝음을 잃고 소금이 짠맛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살아있는 법이 아니라 병들고 죽어 가는 법이다. 법이 생명을 잃으면 가치의 준거들이 허물어 지고 사회를 지탱하는 권위와 질서의 붕괴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법의 위기는 법만의 위기가 아니라 헌정의 위기인 동시에 사회 전반의 위기가 되는 것이다.
법질서가 깨진 곳에서는 못난 놈이 잘난 사람 행세를 하고 주먹이 제왕처럼 국민 위에 군림한다.
많은 후진국 정치가 사법의 부재를 보여준다.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고고하게 서있어야할 사법이 정치 밑에 무릎을 끓고 단순한 지배의 도구로 전락해 시녀처럼 봉사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시녀화한 사법에「법과 양심에 따른 공정한 심판」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정치권력이 의회와 정부를 한손에 장악하는 데서 오는 전제와 독선도 견제할 수 없다.
공권력과 국민간의 갈등, 여당과 야당 사이의 갈등, 노사간의 분쟁, 그리고 사회 여러 이익집단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조정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법정에 선 피고인들이 인권 침해 사실을 호소해도 이것이 묵살되고 고문이나 강박상태에서의 진술을 증거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판결을 한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간다.
사법이 국민들의 눈에 이런 모습으로 비칠 때 국민들은 사법을 불신하고 사법을 통한 권익 보장이나 분쟁의 종결이란 적법절차에 등을 돌리고 비합법적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툭하면 집단행동으로 항거하고 과격 시위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불안양상도 이런 맥락에서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
최근에는 법정에서조차 과격 시위·난장판이 벌어지고 사법절차 자체를 부인하려는 듯 첫 공판부터 아예 출정을 거부하거나 인정신문조차 불응하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물론 이런 기피신청이나 거부행위가 일종의 정치투쟁 방법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국관련 사건에서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의 남용 경향에 대해 사법부가 제대로 견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주장들을 모두 일부의 억지며 생트집이라고만 돌릴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권력이란 본질적으로 침해적 본성을 갖는다. 필요할 때는 사법까지도 유용하게 써먹는 통치수단으로 삼으면서 권력 스스로를 견제하는 규정은 무시하려 드는 것이 그 속성이다.
우리의 사법사는 이러한 정치권력에 의한 수난의 역사며 불행한 우리의 헌정사만큼이나 상처투성이다. 오죽했으면 어느 대법원장은 물러나면서『재임 기간은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었다』고 퇴임사를 했을까.
얼핏 보아 사법부는 이처럼 수난의 대상이고 허약하게 보일 수 있다. 정의와 인권 보강의 최후의 보루라 하지만 거기에는 요새도 총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법에는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제자리를 지켜 가는 양식있는 법관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존엄한 것이다.
보수주의자인「아이젠하워」에 의해 대법원장에 임명된「얼·워런」은 대통령의 임명 동기와는 달리 인종문제, 노사문제, 피고인의 기본권문제, 그리고 언론자유 등 미국의 격동기 사회문제들을 그의 진보주의 철학으로 해결해 가면서 훌륭한 판례들을 만들어 놓았다.「닉슨」이 임명한 대법원장이나 판사가「닉슨」정부를 위한 판결을 내리지 않았음도 양심의 판결임을 증명한다. 그래서 미국의 사법부는 위대하다고 불리는 것이다.
『국민의 생명이나 자유, 재산권, 행복 추구, 기본 인권, 언론· 집회·결사의 자유는 의회나 대통령의 힘으로 수호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의 힘에 의해 지켜져 왔다』고 말한 「로버트·잭슨」판사의 말은 옳다.
이러한 사법의 독립성과 양식이 없다면 그 나라의 사법부는 의미를 잃는다.
국민들은 법관에게 이러한 양식과 지혜와 용기를 기대하며 법관들이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때 사법부를 성원하고 존경하며 애정을 보내게 된다.
또 사법부는 국민들의 성원과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그 권위를 지킬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판결의 공정성을 통해 이룩되며 판결의 공정은 바로 법관 스스로의 노력과 결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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