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출수록 더 노출되는 법, 일찍 실토하는 게 최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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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22면

위키리크스가 미국 외교전문을 폭로한 직후인 2010년 11월 29일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국무장관(오른쪽)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는 가운데 필립 크롤리 공보담당 차관보(왼쪽)가 기자들에게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튀니지의 독재자를 하야시키는 등 ‘아랍의 봄’을 촉발하는 역할도 했다. [로이터=뉴시스]

“… 대통령 측근은 부패의 연결점 또는 일종의 마피아로 인용되고 있다. … 측근은 국민의 극심한 분노를 사고 있다. 측근의 수많은 부패 의혹은 그들의 낮은 교육수준, 낮은 사회적 지위, 사치스러운 소비행태와 함께 거론된다. … 대통령이 부패의 심각성조차 몰랐다고 믿기는 어렵다. … 측근은 … 국유지를 무상으로 받고 … 추가로 정부지원을 받았다가 … 팔아 치웠다. 측근은 … 넘기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측근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고 … 자신에게 전화만 하면 알아서 처리해주겠다는 말도 했다. … 측근이 챙기는 봉사단체에 기부하면 일이 순조롭게 돌아간다. … 국회의원조차 … 기부를 거부했다가 여러 압력을 받았다. … 측근은 수수료를 받고 학교 입학이나 공직 취업을 알선해주던 브로커였다. … 측근의 부패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는 많은 국민들을 분통터지게 하고 있다. 측근은 … 법규에 따라 의무가 부과되자 분노한 채 도지사 사무실에 난입해서 … 행패를 부렸다. … 오히려 도지사가 파면됐다. 정부의 강력한 언론 검열로 측근의 부패 스토리는 보도되지 않는다. 언론이 측근의 부패를 보도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한 개그맨의 구속은 표면적으로 마약 관련이었지만 대통령과 측근을 풍자한 30분짜리 1인 쇼 때문인 것으로 인권단체들은 보고 있다. … 맥도날드가 측근과 연결된 업체에 프랜차이즈를 주지 않자 이에 정부는 맥도날드에 관련 행정 조치를 해주지 않아 맥도날드의 국내 진출은 무산됐다. … 국민 분노를 자아낸 것은 측근의 지나친 부패이다. 높은 인플레와 실업에다 측근의 과시적인 부와 지속적인 부패 소문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

[미국 대사의 정세 보고 電文 공개돼 충격]
지금으로부터 꼭 6년 전인 2010년 11월 28일, 위키리크스는 미국 국무부가 세계 274개국 주재 미국 대사관과 주고받은 기밀 전문(電文)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위 인용문은 그 공개된 국무부 기밀 전문 가운데 하나로, 튀니지 주재 미국 대사가 튀니지 정세에 대해 2008년 6월 23일 본국에 보고한 내용이다.


인터넷과 해외 언론을 통한 위 전문의 공개는 튀니지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당시 튀니지 대통령은 2009년 10월 선거에서 90%의 득표율로 다섯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였다. 튀니지 국민들은 벤 알리 대통령 패밀리의 전횡을 이미 소문으로 듣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위 기밀문서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대부분의 튀니지 국민들은 대통령 패밀리의 국정 농단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련의 튀니지 국민 저항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먼저, 대학 졸업 후 취직을 못했지만 9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한 청년이 청과물 노점상을 하다가 2010년 12월 17일 경찰과 시청의 단속에서 청과물과 수레를 빼앗기자 분신자살을 시도했고, 다음해 1월 4일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외에 2010년 12월 하순만 해도 배고픔, 미취업, 신용불량 등으로 송전탑에서 감전사한 것을 포함한 여러 자살 사건 그리고 경찰 총격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1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이 망명하기 몇 시간 전의 튀니지 시위 모습.

12월 28일 벤 알리 대통령은 분신 청년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하는 한편, 기자회견에선 튀니지에 적대적인 외국 방송사들이 증거 없이 거짓 정보를 퍼트린다고 비난했다. 2011년 1월 17일에는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도 위키리크스의 폭로 내용이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미국 국무부의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고 튀니지 시위도 그와 관련된 서방 세계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정작 카다피 본인은 내전에 패전하면서 비참하게 사살되고 말았지만.


튀니지 정부가 일부 지역의 통행금지령과 언론 및 인터넷의 검열 강화를 실시했으나 시위 확산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벤 알리 대통령은 더 이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2014년 임기 만료일에 은퇴하겠다고 1월 10일 발표했다. 국민의 반발이 계속되자 1월 14일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야간통행금지령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내각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하지만 대통령직에서 당장 물러나라는 국민의 요구를 꺾을 수는 없었다. 군부 역시 대통령보다 국민의 편에 섰다. 같은 날 오후, 벤 알리 대통령은 23년의 통치를 종식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2010년 12월 중순부터 2011년 1월 중순까지 전개된 튀니지 국민에 의한 정권교체 과정은 재스민 혁명으로 불린다. 튀니지의 국화(國花)에서 따온 재스민 혁명 명칭은 주로 서방 언론에서 사용되고 있다. 튀니지 국민들은 존엄성 혁명으로 부르기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벤 알리가 총리로 재직하던 중 정권을 장악한 1987년 혁명도 재스민 혁명이나 튀니지 혁명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튀니지 국민들은 시디부지드 항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청년의 분신자살이 있었고 그에 따라 본격적인 시위가 처음 발생한 도시 이름을 따온 명칭이다.

[위키리크스도 폭로한 최순실과의 관계]
명칭이 무엇이든 6년 전의 튀니지 정권 교체 운동은 북아프리카와 아랍에서 쿠데타 없이 민중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첫 번째 사례이다. 따라서 주변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집트·리비아·예멘 등에서 길게는 42년 동안 장기 집권한 독재 정권이 축출됐다. 이른바 ‘아랍의 봄’ 사건이다. 2011년 중국의 민주화 시위도 튀니지 혁명에서 영향을 받아 재스민 혁명으로 불린다. 그런 일련의 혁명들은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일부 기인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힐러리 클린턴 미국 대통령 후보와 박근혜 대통령과 관련해서도 위키리크스 자료가 인용된 바 있다. 6년 전 위키리크스가 미국 국무부 기밀전문을 폭로했을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은 클린턴이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클린턴 후보에게 불리한 여러 e메일을 위키리크스가 공개했고 클린턴 후보는 낙선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의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매체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내용들을 보고 있자면, 6년 전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기밀문서를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대통령 측근의 국정 농단에 관한 튀니지 주재 미국 대사관의 전문 내용뿐 아니라, 박근혜-최순실 관계에 관해 서울 주재 미국 대사관이 직접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 구절도 떠오르게 된다. “… 고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 후보의 심신을 인격형성 시기에 완전히 통제했고 또 최 목사의 자녀들은 축재했다는 소문이 만연해 있다. …”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에 관한 소문은 이미 오랜 전부터 돌았다. 그러던 차에 JTBC가 최순실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 PC의 파일 내용을 폭로하면서 또 연이은 여러 언론의 후속 보도가 이어지자 대한민국 국민은 격하게 반응했다. 대통령 지지도는 한 자리 수로 곤두박질쳤다. 구체적인 근거가 나오니 국정 농단이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구체화됐고 또 행동으로 연결된 것이다. 무릇 정치는 동원으로 세력화하고, 정치적 동원은 감성으로 동력화하며, 원초적 감성은 보이는 걸로 증폭하기 때문이다.

['감추려면 더 노출' 스트라이샌드 효과도]
위키리크스의 폭로 문서가 많은 주목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밀 자료로 분류된 문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급비밀까지는 아니고, 공개하는 게 부적절한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관련 국가들에서 정부 주도로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폐쇄하자 네티즌이 그 내용을 실어 날라 더 많이 알려지게 되기도 했다.

2 2002년에 촬영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저택의 항공 사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트라이샌드의 저택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2003년 스트라이샌드가 사진 삭제를 주장하면서 자세히 알게 됐다. [중앙포토·위키피디아]

실험 참가자들에게 특정 내용을 생각하지 말라고 주문하고 실험을 진행하면 참가자들이 오히려 그 내용을 더 많이 떠올린다는 여러 실험 결과들이 있다. 삭제를 요구한 내용일수록 조회 수가 오히려 많은 법이다. 2003년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어떤 인터넷 사이트의 캘리포니아 해안가 사진에 자신의 집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한 후 사생활이 침해되었다면서 삭제를 요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해당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했고 자연스럽게 스트라이샌드 집의 위치와 모습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출하지 않으려 하면 오히려 더 노출되게 되는 현상을 스트라이샌드 효과로 부르고 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사안 가운데 애초 감추려 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도 않았을 내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감춤이 또 다른 감춤까지 낳은 것이다. 세월호 사건 발생 당시 7시간의 대통령 행적도 감추려고 하니 국민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감출 수 없다면 일찍 실토하는 게 더 나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대통령 행적 및 비선과 관련한 각종 내용은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폭로와 의혹 제기의 파급 효과가 배가됐다. 애초 숨겨진 게 아니었더라면 폭로 효과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불신을 받을 때에는 공개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최악의 경우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밝히고 감수하겠다는 태도가 진정성을 얻는 길이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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