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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들고 올 줄 모르는 남자 싫다”던 장잉, 첸쉐썬과 결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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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28면

1 결혼 9일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첸쉐썬을 전송하는 장잉. 1947년 9월 17일 상하이.

1947년 여름, 12년 만에 귀국한 첸쉐썬(錢學森·전학삼)에게 모교 자오퉁(交通)대학과 칭화(淸華)대학 등에서 강연 요청이 빗발쳤다. 베이징대학 교장 후스(胡適·호적)가 공학원 원장을 제의하자 교육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언론기관에 첸쉐썬을 자오퉁대학 교장에 내정했다고 발표해 버렸다. 카먼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훗날 다른 사람이 내게 말해줬다. 첸쉐썬은 모교와 베이징대학의 초빙을 미국에서 더 연구할 게 있다며 완곡하게 사양했다. 내게 보낸 편지는 국민당 정부가 너무 무능하고 부패했다며 짜증 섞인 투였다. 이런 정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헤어질 때 16살이었던 장잉(蔣英·장영)도 다시 만났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성악을 전공한 장잉은 성황리에 끝난 독창회 덕에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장잉은 아버지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가 첸쉐썬을 사윗감으로 점 찍은 사실을 몰랐다. “아버지는 쉐썬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내가 독일에 있을 때 미국에 간다며 내 사진을 들고 갔다. 쉐썬에게 주려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신문을 통해 귀국한 것을 알았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쉐썬은 36살이 되도록 여자친구가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루는 쉐썬의 부친이 우리 엄마에게 장잉에게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엄마는 아주 많다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라 성에는 차지 않았다. 쉐썬도 마찬가지였다. 오죽 주변머리 없으면 그 나이 되도록 혼자인가 싶었다.”

[“멋대가리 없는 남자를 왜 귀여워했을까”]


첸쥔푸(錢均夫·전균부)는 매주 아들 쉐썬과 함께 먹을 것을 들고 장잉의 집을 찾아왔다. 주변에서 장잉에게 부탁했다. “쉐썬에게 여자친구 한 명 소개해 줘라.” 장잉은 언니와 함께 적당한 사람을 물색했다.


첸쉐썬은 장잉이 소개해준 여자에게 흥미가 없었다. 장잉은 난처했다. “쉐썬은 올 때마다 우리 엄마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하루는 쉐썬이 돌아가자 엄마가 나를 불렀다. 쉐썬이 뻔질나게 오는 이유를 설명하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꽃도 들고 올 줄 모르는 남자는 싫다고 했다. 엄마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챘다. 네 아버지 같은 남자는 없다며 훌쩍거렸다.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할 때 매화나무 200그루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쉐썬처럼 멋대가리 없는 남자를 왜 귀여워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장잉의 언니들도 첸쉐썬을 마땅해하지 않았다. “저런 남자와 가까이하면 큰일난다.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하니 명심해라.” 첸쉐썬은 끈질겼다. 매일 찾아와 앉아만 있다 가곤 했다. 하루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미국에 가자. 이번 귀국 목적은 단 하나, 너를 데리러 왔다.”


장잉은 거절했다. “싫다. 편지나 주고받자.” 첸쉐썬은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말만 계속했다. 장잉이 투항할 기미를 보이자 큰언니가 끼어들었다. 언니는 미국에서 첸쉐썬과 같은 도시에 산 적이 있었다. 미국시절, 어법학자 자오위안런(趙元任·조원임)에게 들었던 얘기를 해줬다. “자오 선생이 옆집에 사는 예쁘고 똑똑한 여자애를 쉐썬에게 소개했다. 쉐썬은 툭하면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고, 나왔다가도 급한 일이 생겼다며 연구실로 달려가기가 일쑤였다. 자오 선생은 망신당하려면 쉐썬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줘라는 말을 자주했다.” 언니의 말을 들은 장잉은 첸쉐썬과 결혼을 결심했다.

[태어나자마자 사윗감이라 좋아해 ]

2 사망 2년전, 장제스와 함께 시안(西安)에서 장쉐량에게 억류됐다 풀려난 직후의 장바이리. 1936년 12월 28일 상하이.   [사진 김명호 제공]

장잉은 아버지 장바이리가 첸쉐썬이 태어나자 장차 사윗감이라며 좋아했던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만년(晩年)에 두 집안 이야기를 술회했다. “우리 아버지와 쉐썬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마친 후 자주 왕래했다. 쉐썬은 외아들, 우리는 딸만 다섯이었다. 쉐썬의 엄마는 딸 많은 우리 엄마를 부러워했다. 정 부러우면 한 명을 줄 테니 고르라고 하자 셋째 딸을 달라고 했다. 나는 엄마 따라 쉐썬의 집으로 갔다. 이름도 첸쉐잉(錢學英·전학영)으로 개명했다. 다섯 살 때였다. 열 몇 살이었던 쉐썬은 나와 잘 놀지 않았다. 내 기억에 쉐썬은 하모니카가 있었다. 내가 불어보려 하자 못 불게 했다. 울화통이 터져서 쉐썬의 아버지에게 일렀더니 나 데리고 나가 새 하모니카를 사줬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쉐썬이 내 하모니카를 자기 것과 바꿔치기 한 것을 발견했다. 그날 이후 얼굴만 마주치면 대판 싸웠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쉐썬의 엄마가 도저히 안되겠다며 나를 다시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다. 커가면서 쉐썬의 부모들을 양아버지, 양어머니라 불렀다. 내가 중학생이 되자 쉐썬은 자주 놀러 왔다. 내가 피아노 치면 옆에서 노래도 불렀다. 미국 떠나는 날 아버지와 함께 부두에 나갔다. 얼마 후 나도 독일로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다. 아버지는 내가 사진을 찍으면 한 장씩 들고 갔다. 훗날, 쉐썬의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아버지에게 있어야 할 사진들이 쉐썬의 책갈피에 있었다. 멋쟁이 아버지가 쉐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비로소 알았다.”


장잉과 결혼식을 마친 첸쉐썬은 MIT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일 개월 후, 장잉도 보스턴행 비행기를 탔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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