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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1. 미묘 - 달이 작아진 밤의 호수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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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는 생각했다.
달이 늘 커다랗게 떠 불만이었는데 오늘은 적당히 작아져 좋다. 걸음이 가벼웠다. 외투는 두툼했고 새로 산 신발은 부드럽게 발에 감겼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한밤에 건너는 일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들은 비와 안개와 폭설을 뚫고 묘에게로 왔다. 묘에게 그것은 무표정했고, 나무들 위로 떠다니다 춤추듯 앞으로 다가와 몸을 감쌌다. 묘는 걸음을 멈추고 미를 돌아보았다. 그는 저만치 뒤에 있었다. 손바닥으로 귀를 감싸며 걸어왔는데 한 번씩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우뚱해졌다. 저런 걸음으로 언제 호수에 도착할까 싶었지만 미를 내버려 두었다.
눈이 그친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묘와 미의 발짝 소리만 작게 숲을 울렸다.
묘의 예상대로 호숫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어붙은 호수와 달빛과 단단하게 다져진 둑의 흙과 미와 묘뿐이었다. 미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하얀 입김이 묘에게까지 와 닿았다. 어디선가 짐승의 길게 이어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묘는 늑대의 울음일 거라 짐작했다. 숲의 어둠 속 어딘가 몸을 웅크리고 있을 야생의 생물들은 얼마든지 있겠지. 미가 묘의 옷을 잡아끌었다. 묘가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곧 손을 놓았다.
묘와 미는 호수의 가장자리로 올라섰다. 언제나 그랬듯 묘가 앞서고 미가 뒤를 따랐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바람도 없는 세계였다. 호수를 덮은 얼음은 온통 하얗고 단단했다. 수십 채의 빌딩을 올려놓는다 해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빌딩들, 어디에나 유리창이 박힌 도시의 빌딩들. 그들은 호수를 건너기 위해 숲으로 들어서기 전 빌딩 사이를 가로질러왔다.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의 밤은 항아리 밑바닥처럼 고요했다. 묘와 미는 걷고 있었고 번들거리는 빌딩의 유리창들이 일렁일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부딪쳐 오면 이유 없이 목이 움츠러들었지만 걷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묘는 그때 자신의 길이 끝없이 걸어야 하는 여정의 연속임을 직감했다. 그러고 나자 거리의 모든 굴곡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냄새나고 습하고 그늘진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엉켜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점점이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저 멀리까지 즐비했다. 묘는 걸음을 멈추고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먼 풍경이었다. 그 어느 곳도 아닌 기묘한 세계에 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길은 어디와도 이어져 있지 않고 이 여정에 끝은 없고 아침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돌아갈 수 있을까?”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미였다. 묘는 단단해서 더 미끄러운 호수의 얼음 위를 걷느라 발끝에 온 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묘가 걸음을 멈추자 미도 멈칫 자리에 섰다.

“돌아가고 싶냐? 가려면 지금 가.”

묘의 말에 미의 얼굴이 푸른 어둠 속에서 묘하게 일그러졌다. 묘는 고개를 돌려 호수가 끝나는 지점을 어림잡아 바라보았다. 펼쳐진 것은 끝없는 얼음 위의 길뿐이었다. 호수를 둘러싼 숲에서 쏴아아 빗줄기처럼 찬바람이 불어왔다. 미가 쭈뼛거리며 발을 떼었다. 이번에는 미가 앞서고 묘가 뒤에 걸었다.

“노래라도 부를까?”

미가 돌아보며 말했다. 묘는 대답 없이 하얀 입김 섞인 숨을 내쉬었다.

“노래를 부르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나는 외롭고 사방은 너무 조용하니까 그냥…”

묘가 여전히 말이 없기에 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눈발 섞인 바람이 저 멀리 몰려오고 있었다.
호수 주변의 나무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어둠 속에서 높은 나무줄기들은 마차 바퀴가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이 휘몰려오는 일은 묘가 예감했던 일이었다. 혹한의 밤, 도시 외곽의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라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감했다 해도 바퀴처럼 한 덩어리로 우우 곧장 달려오는 것 앞에 있으니 몸이 떨려왔다.

“멈추지 말고 걷게나.”

시커먼 그림자가 옆으로 지나가며 말했다. 두툼한 점퍼에 방한화를 신고 머플러로 얼굴의 반까지 감싼 초로의 남자였다. 그는 기묘하다 싶을 정도로 빨리 걸어갔는데 벌써 저만치 앞에 있었다. 묘는 언짢아져 옆에 있던 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미는 묘의 손가락에 감긴 줄인형처럼 쉽게 딸려왔다.

묘는 작아져 적당하다 생각했던 달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호수 위를 한 바퀴 휘도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울음 같은 눈 섞인 바람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미와 묘는 한자리에 서 있었다. 저 거대한 세계를 뚫고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묘는 목 부분까지 단단하게 점퍼를 여몄다.
미가 무언가에 놀란 듯 몸을 떨었다. 어쩌면 호수를 건너는 처음부터 떨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라 묘는 생각했다. 미는 묘가 아는 이들 중 가장 나약한 사람이었다. 무엇도 혼자 결정 내리거나 시도하지 못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없었다. 익숙한 길에서 예외 없이 길을 잃었다. 평평한 곳에서도 자주 균형을 잃고 몸이 기우뚱해졌다. 묘가 아는 미는 그런 사람이라 모든 결정은 그가 했다. 거의 매번 앞서 걷는 것도 묘의 자세였다. 묘는 자기가 미의 몫까지 결정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는 묘가 잡아당기는 대로 유순하게 몸을 맡겼다.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무구한 어린아이 같은 눈동자로 묘를 먼저 바라보았다. 묘는 책임감으로 피곤했지만 미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음이나 몸이 먼저 튀어나가는 일이었기에 이유 같은 건 알려고 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미는 언제나 곧 울 것 같은 아이의 눈으로 옆에 있었다.

묘가 눈발 섞인 바람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미는 묘의 등 뒤에 붙어 섰다. 너무 바짝 붙어 서로 발이 엉켰다. 묘는 기우뚱 넘어지려는 미의 팔을 재빨리 잡아 세웠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미가 묘를 향해 웃었다. 묘는 미의 웃음이 바보 같다 생각했다. 묘에게 미가 한 번도 바보 같지 않은 적은 없었다.
미와 묘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묘는 배가 고파졌다. 돌이켜 보니 오늘 아침 냉장고에 있던 딱딱하게 마른 빵 조각과 찐 달걀 하나와 커피를 마신 게 다였다. 미도 마찬가지였다. 묘는 배가 고프다 투정하지 않는 미가 조금은 다행스러웠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주었을지 모른다. 울지 않는 미가 고마웠다. 미는 언제나 울음부터 터뜨렸다. 사내새끼가 다 자라지 않은 계집아이처럼 징징 짜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피곤하다.
한기 속에서 묘는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온몸이 플라스틱처럼 빳빳했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올 때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두툼하게 옷을 껴입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가난했지만 묘에게는 잠을 잘 수 있는 방이 있었다. 호수를 건너는 일만 아니라면 다시 돌아갈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 미묘한 균형의 세계가 조금 그리웠다.
묘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자기는 그렇다 치고 미는 무얼 했던 것일까를 생각했다. 미는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미를 향해 절대 대답이나 질문 같은 건 해주지 않아. 묘는 걸음을 멈추고 자기가 걸어온 호수 위의 길을 다시 돌아보았다. 묘는 어느 순간이 되면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자기 발자국을 가늠하는 습관 같은 거였다. 미도 뒤를 돌아보았다.
저 혹한의 어둠 속을 우리가 걸어왔다. 미끄러운 얼음 위의 길을 이렇게나 많이 온 것이다.
묘는 말하고 싶었지만 미를 안심시켜주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침묵하면 미는 불안의 세계로 내려앉는다. 건져주는 일 따위, 다독여주는 일 따위 지금은 하지 않겠다. 묘는 그런 생각으로 걸음을 떼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방으로 비명 같은 바람이 가득했기에 유심히 듣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소리였다. 미가 불안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묘는 비명의 장소를 찾으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희끗한 눈 사이로 검은 형체가 보였다. 거리가 멀지 않았다. 그것은 둥근 공처럼 바닥에 웅크린 자세였다. 그렇게 보였다. 묘가 그쪽으로 발을 옮기자 미가 점퍼를 잡아끌었다. 묘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미는 체념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바닥 쪽의 검은 형체는 조금 전 미와 묘를 빠르게 지나쳐갔던 초로의 남자였다.

“자네가 와서 정말 다행이야. 구멍에서 몸을 뺄 수 있게 나를 좀 잡아당겨주게나.”

묘는 남자가 빠진 구멍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쭈그려 앉았다.

“여기에 구멍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얼음 두께를 한 번 보게. 이렇게 견고한데 구멍이 있을 리 없잖나. 하지만 발이 빠졌단 말이지. 멍청하게도 구멍을 못 봤단 말이지.”

남자는 얼음에 뚫린 구멍 사이로 오른쪽 팔다리와 골반 한쪽까지 빠진 상태였다. 구멍 밖의 왼쪽 다리가 깃대처럼 위로 치켜올라가 있어 중심을 바로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묘의 눈에 남자는 컵에 뾰족하게 꽂힌 냅킨처럼 보였다. 그래서 조금 웃었다.

“그래, 웃긴 일이지. 정말 우습지 않나. 이런 꼬락서니를 좀 보게나.”

남자가 한쪽 다리를 치켜든 채로 구멍 밖의 한쪽 팔을 휘휘 저어 보였다.

“하나이긴 해도 팔이 이렇게 멀쩡한데, 멍청하게.”

남자는 멀쩡한 한쪽 팔 때문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팔로 얼음을 짚고 일어나 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묘와 미는 바짝 붙어 서서 다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묘는 웃었던 일을 곧 후회했다. 그의 생각에 자기는 타인의 불행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건 미처럼 매번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다.

“자, 어서 자네 손을…….”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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