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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가곡에 대한 신선한 시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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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호 32면

저자: 이언 보스트리지 역자: 장호연 출판사: 바다출판사 가격: 2만5000원

음반이 아니다. 책이다. 저자인 이언 보스트리지(52)는 영국 출신의 테너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인문학에 조예 깊은 학자이기도 하다. 케임브리지에서 철학 석사를, 옥스퍼드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법과 그 변천사’라는 논문도 발표한 마녀 사냥 관련 분야의 전문가다.


성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그는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늦게 음악을 시작했다. 1993년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한 이후 이지적인 리트(독일가곡)의 텍스트 분석으로 각광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보스트리지는 작품의 기원과 시대적 배경에 관한 다독가로 손꼽힌다. 선율에 푹 빠져서 음악 안에서 음악을 배우는 가수다. 절제를 중시하는 보스트리지는 “리트에서도 오페라처럼 메사 디 보체(점점 세게, 점점 여리게 부르는 표현의 스펙트럼)를 써서 피아노와 피아니시모를 확실히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가 작곡한 ‘겨울 나그네’는 보스트리지에게 중요한 작품이다.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 24편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집이다. 그는 이 곡을 30년 동안 100여 차례 공연했다. 2004년 첫 내한공연 때도 ‘겨울 나그네’ 전곡을 들려줬다.


보스트리지가 쓴 이 책은 가곡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가이드북이 아니다. “청자가 음악을 경험하는 방식과 이론적 용어로 음악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방식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니콜라스 쿡의 언급을 읽고 용기를 얻어 집필하게 됐다고 한다.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일견 단점을 그는 장점으로 살려 훨씬 넓은 틀을 통해 작품을 들여다본다. 저자가 제시하는 낯선 관점들은 각자 매혹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자료를 모으고 집필하는 데 꼬박 2년이 걸린 이 책에서 보스트리지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머리(지성)와 가슴(감성)의 결합물인 리트를 충실하게 풀어낸다. 텍스트를 자신의 몸으로 소리내 울린 경험의 소유자답다. 몸을 통한 시어의 표현을 체험한 사람만이 가능한 ‘촉’이 빛난다. 예기치 않은 다양한 각도에서 깊이 울리는 설득력이 이 책의 묘미다.


첫 곡인 ‘밤 인사’는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네’로 시작된다. 보스트리지는 첫 단어인 ‘Fremd’의 의미를 ‘타인의/다른/외국의/낯선/상대의/외부의’로 분석하며 슈베르트 작품들 곳곳에 드리워진 ‘방랑’과 ‘소외’의 의미를 탐구한다. 저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 민족주의를 틀어막았던 1820년대, 슈베르트가 살던 빈이나 뮐러가 지내던 데사우에서 독일인은 이방인이었다고 말한다.


제2곡 ‘풍향기’에서는 가족의 가식과 예측 불가능한 여성의 마음, 당대의 조리돌림 풍속과 결혼 문화를 끄집어내고 제3곡 ‘얼어붙은 눈물’에서는 슬라보이 지제크를 인용해 전쟁의 포성을 이끌어내는 한편 울음의 효용을 말한다.


가장 유명한 곡인 제5곡 ‘보리수’에서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과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지나 말러 가곡에 다다른다. 제9곡 ‘도깨비불’에서는 뮐러의 시와 괴테의 동화, 블레송의 과학적 연구를 검토한다.


제20곡 ‘이정표’에서는 권태롭던 유럽에서 바라본 신세계 미국이, 제21곡 ‘여인숙’에는 카프카의 ‘성’이 나온다. 제22곡 ‘용기’에서는 슈베르트의 생애와 종교가 펼쳐진다. 제23곡 ‘환상의 태양’에서는 ‘세 개의 태양’이 소녀의 두 눈과 태양이란 투박한 해석과 더불어 무리해와 무지개를 다룬다. 마지막 제24곡 ‘거리의 악사’에서 보스트리지는 슈베르트의 허디거디를 밥 딜런의 ‘미스터 탬버린맨’과 연결시킨다.


이 책을 읽으며 보스트리지가 노래하고 안스네스가 피아노를 반주한 ‘겨울 나그네’를 반복해서 들었다. 해당곡을 들으며 읽으니 한 곡 한 곡의 지평이 넓어진다. ‘겨울 나그네’ 작품 하나만의 얘기가 아니다. 슈베르트의 고통과 상실, 고독이 현대를 사는 우리와 슬며시 대화를 나눈다.


글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음악 칼럼니스트kinsechs062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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