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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강유정의 까칠한 시선] 한국영화는 ‘권력형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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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그려진 여성, 특히 권력 근처의 여성들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이다. 우선 ‘역린’(2014, 이재규 감독) ‘간신’(2015, 민규동 감독)과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한(恨) 많고 표독스러운 여성이 하나의 전형이다. 권력욕이 강하지만 ‘여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아들 혹은 남편의 권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캐릭터도 종종 나온다. 통한의 세월을 거쳐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인물도 있다. 어쨌거나 일정한 역사적 시기를 배경으로 다루는 코스튬 드라마에서, 여성들은 외골수이며 목적을 위해서라면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우리가 영화, 그러니까 서사를 통해 기억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자주 영화화된 조선 왕조 인물 중 하나가 연산군(1476~1506)인 점도 그렇다. 연산군을 다룬 이야기에는 으레 그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장녹수(미상~1506)가 등장한다. 당시 연산군의 악행을 설명하는 데 욕심 많은 여인 장녹수가 매우 입체적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숙종(1661~1720)과 장희빈(1659~1701)도 여러 차례 허구화됐다.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 이후 숙종이 ‘후궁이 왕후로 등극할 수 없는 법’까지 만들었다니 실로 대단한 정치 스캔들이었음에 분명하다.

"한국영화에서 권력형 여성을 제대로 다룬 적이 있었나 싶다. 왜곡에 가까울 만큼 재창조된 인물이 아니라, 인간학적 관점에서 삶을 파고든 이야기 말이다."

이쯤에서 다시 돌아볼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덕혜옹주’(8월 3일 개봉, 허진호 감독)다. 덕혜옹주(1912∼1989)는 소설가 권비영의 『덕혜옹주』(다산책방)를 통해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왜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많은 사람들이 “소설 속 덕혜옹주의 기구한 삶에 연민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근원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일단 덕혜옹주의 혈통에 기인한다. 왕의 사랑을 듬뿍 받던 늦둥이 옹주 덕혜는 아버지를 여의고 고난에 빠진다. 대중이 연민을 느낀 1차적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왕족임에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대적 상황이 마음 아픈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나라 잃은 왕가의 자손으로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다.

영화 '덕혜옹주'

그런데 생각해 보자. 과연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불행하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적극적으로 친일 예로부터 ‘여성 정치의 메카’는 영국일 것이다. 이들의 인생을 조명한 영화도 많다. 절대 왕정 시대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에 대한 서사들, 영국 최초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의 전투적 삶을 다룬 ‘철의 여인’(2011, 필리다 로이드 감독), 황태자비였던 다이애나 스펜서(1961~1997)의 죽음 이후 엘리자베스 2세(90)가 보인 행보에 주목한 ‘더 퀸’(2006,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실존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뒤집어 보기’다. 인간학의 관점에서 정치적 인물을 다시 살펴봄으로써,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정치 인생의 사각지대를 비춘다. 이는 단순히 공로와 과실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맥락 속에서 한 인간의 선택과 행동을 되짚는 과정이다.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그와 같은 사각지대를 비춘 권력형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나 싶다. 왜곡에 가까울 만큼 재창조된 인물이 아니라, 인간학적 관점에서 한 사람의 생을 깊이 있게 파고든 이야기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 2016년 11월의 정국은 한 번쯤 분명 서사로 거듭나지 않을까.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과연 그때 이토록 비현실적인 현실은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이처럼 절망적 스토리가 어떤 플롯으로 재구성될지, 지금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글=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학교 교수, 허구 없는 삶은 가난하다고 믿는 서사 신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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