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 <편집 부국장>/진정 개헌을 할 생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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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작년부터 여야가 모두 마치 개헌만이 살길인양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막상 개헌이 이룩될 전망은 오히려 더 어두워지고만 있다.
모든 정치세력이 개헌을 하자는데도 그 전망이 더욱 어두워졌다면 이유는 두 가지, 또는 그 두가지 중 하나다. 겉으로 하는 말과 달리 개헌에 대한의지가 약하거나 협상과 타협을 통해 개헌이란 결과를 성사시켜낼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거나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개헌의 전도에 대한 걱정은 강행과 저지에만 익숙해온 우리 정치문화에서 과연 개헌이란 어려운 문제에 합의가 이룩 되겠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우리 정치인들의 역량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개헌을 할 의사가 진짜 있느냐에 대해선 별로 회의가 없었다.
그러나 과연 여야 정당의 개헌의지는 그토록 당연하다고 봐도 좋은 것인가.
여야의 개헌의지를 일단 비판적 안목에서 따져 보면 이 또한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국회에 개헌선을 가진 정당이 없는 이상 개헌은 정당간의 협상과 합의로만 가능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의원내각제를 하자는 집권당에나, 직선대통령제를 주장하는 야당에나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고사하고 여야간에 대화다운 대화 한번 제대로 않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
모처럼 만든 국회개헌특위마저도 변죽만 울리다 문을 닫아 버린지가 벌써 다섯달째다. 언제쯤 다시 헌특이 빛을 보게될지 전혀 기약조차 없다.
지금도 여야간에는 내각제 관철, 직선제 관철의 다짐만 접점 없이 엇갈리고 있을 뿐이다.
어떤 대전환의 계기 없이 이런 불임의 논쟁만 계속되다간 아무 진전 없이 세월만 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합의개헌이 안되면 「합법개헌」 으로라도 의원내각제를 추진하겠다던 집권층 내부에서는 요즘 합법개헌의 유용성에 회의가 일고 있다고 한다. 그랗다면 합의개헌이 안됐을 때 논리적으로는 현행헌법으로 간다는 호헌론이 유력해질 수밖에 없다. 원래 합법개헌이란 방안은 그러한 일방적 개헌이 정통성 논쟁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격화시킬 위험성 때문에 차선도 못되는 궁여지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하튼 합법개헌 제의 움직임은 현실적으로 개헌이 미뤄질 가능성을 크게 하는 것이다.
야당에 밀려 호헌에서 개헌으로 돌아섰던 집권 측에는 원래부터 호헌론이 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이 복재해 있다. 그리고 야당 쪽에도 정 안되면 당분간 현행헌법으로 가도 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의원들로선 12대 임기를 다 마칠 수도 있는 이득이 있다.
그래서 줄곧 권력구조 논쟁에만 매달려 실질적 협상과 대화를 기피하는 여야 태도는 공연히 입으로만 개헌을 하는 체 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낼 소지가 있다.
지금까지의 개헌 공방과정을 보면 여야간에 대화는 고창되었지만 실제로는 대화가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가끔 여야간에 고위회동인지, 회담인지 하는 것이 열리곤 있으나 스스로도 이름 붙이기가 어정쩡할 정도로 별 결실이 없었다.
밥 먹고 한담하는 것인지, 진지한 정치적 대화를 하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았다. 물론 법 먹는 자리도 여야대화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곁다리 대화가 아닌 본격적인 정치회담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더욱 답답한 것은 여야가 모두 고위회담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직접 만나지를 못하고 중개자가 나서 이런 저런 명분으로 기회를 만들어야 마지못해 만나는 듯한 모양새다. 또 말로는 대화, 대화하다가도 정작 다급한 문제가 생겨 한족에서 꼭 좀 보자고 하면 피해버리고 만다.
더구나 힘이 없는 사람과 만나봐야 문제가 해결되지도, 합의가 잘 지켜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대화상대로서 상호 신뢰가 쌓일리 없고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은 점점 어려워지고만 있다.
이런 형해화 된 대화로 개헌 같은 삼엄한 문제가 해결되기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여야간에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대화가 있어야 한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합의란 상호 양보를 전제로 한다. 이렇게 불가피한 양보를 당내에서 소화시키려면 힘있는 사람들이 나서지 않고선 될 일이 아니다.
작년 말 신민당총재의 7개항 민주화 구상이 상당한 여론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당론화 되지 못한 것은 그에게 그 구상을 당내에 먹혀들게 할만한 실질적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힘있는 야당 총재의 등장 움직임은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간의 대화로 개헌정국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야당에 실세총재 등장 전이라도 실세대화로 돌파구를 여는 노력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일부에선 상황이 위험선 직전까지 가면 어떤 해결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이른바 「버랑논리」 를 펴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고 본다. 대천명에 앞선 진인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 진인사란 합의개헌을 이룩하기 위해 실세대화와 개헌특위를 포함한 여야간 전면대화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대화 시늉만으로 세월을 보내다가는 여야 정치인 모두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민주개헌을 지체시키고 있다는 국민의 의심을 지우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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