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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 된 악동 매켄로, 성질도 실력도 여전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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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92년 이후 24년 만에 한국을 찾은 테니스의 전설 존 매켄로. 머리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패였지만 시속 145㎞의 강서비스를 구사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1992년 이후 24년 만에 한국을 찾은 테니스의 전설 존 매켄로. 머리엔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패였지만 시속 145㎞의 강서비스를 구사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의 SK핸드볼 경기장. ‘테니스의 전설’ 존 매켄로(57·미국)는 인터뷰 도중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펑펑 터지는 플래시가 거슬렸는지 “사진은 이미 충분히 찍었어요”라며 손을 내저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직설적이었고, 거침없이 감정을 표현했다. 테니스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서야 매켄로의 얼굴이 밝아졌다.

80·90년대 877승 거둔 다혈질 스타
챔피언스투어 기아자동차컵 출전
스물한 살 어린 사핀과 결승 대결
145㎞서브 날렸지만 아쉬운 준우승

12~13일 SK핸드볼 경기장에서 열린 남자프로테니스(ATP) 챔피언스투어 기아자동차 챔피언스컵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매켄로를 만나 근황을 물어봤다. 챔피언스투어는 현역 시절 세계 1위에 올랐거나, 메이저 대회 단식 결승 진출 경력이 있는 선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무대다.

경기를 마친 뒤 티셔츠를 벗어 관중들에게 던져주는 매켄로. 여학생 관중들은 깜짝 놀란 표정이다.

경기를 마친 뒤 티셔츠를 벗어 관중들에게 던져주는 매켄로. 여학생 관중들은 깜짝 놀란 표정이다.

매켄로는 1980년대 남자 테니스 세계랭킹 1위에 오르며 연간 40억원 이상의 수입을 벌어들였던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통산 전적은 877승198패(승률 81.6%). 92년 앤드리 애거시(미국)와 시범경기 이후 24년 만에 한국을 찾은 매켄로는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얼굴 곳곳에 주름이 깊게 파인 모습이었다.

79년 US오픈을 시작으로 메이저 단식에서 7차례나 우승했던 매켄로는 ‘코트의 악동’으로 불렸다. 불같은 성격 탓에 심판 판정에 항의하기 일쑤였다. 경기 도중 욕설을 하거나 라켓을 부러뜨려 테니스 선수 중 벌금을 가장 많이 물었다. 그러나 기행이 늘어날수록 그의 인기는 수직상승했다. 신사의 스포츠인 테니스에 등장한 악동 캐릭터가 신선했기 때문이다. 전성기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매켄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땐 자신감이 넘쳐 흘렀어요. 누구와 시합을 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두려움 따윈 없었어요. 그래서 감정표현이 거칠었죠.”

1980년대 잇딴 돌출 행동을 해 ‘코트의 악동’으로 불렸던 젊은 시절 매켄로의 모습.

1980년대 잇딴 돌출 행동을 해 ‘코트의 악동’으로 불렸던 젊은 시절 매켄로의 모습.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매켄로는 과거 불미스러운 행동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의를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당연하다. 힘이 없어서 라켓을 부러뜨릴 수는 없지만 소리는 질러보겠다”며 웃었다. 그는 약속(?)대로 이번 대회 기간 여러 차례 판정에 불만을 표시해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매켄로를 표현하는 또다른 단어는 ‘왼손잡이’다. 그는 왼손으로 날카로운 서브를 넣은 뒤 환상적인 네트 플레이를 펼쳤다. 왼손잡이는 전 세계 인구의 약 10% 정도다. 당연히 테니스계에서도 왼손잡이는 환영받지 못했다. 매켄로는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보다 더 잘 생기고 지능도 뛰어나다”며 “미국에서도 과거엔 오른손을 써야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도 나는 왼손을 고수했다. 코트에는 왼손 선수가 많지 않아서 유리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92년 은퇴한 매켄로의 행보는 독특했다. 유명 그림을 수집해 미국 뉴욕에 화랑을 얼었다. TV 코미디 프로그램과 할리우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록밴드를 결성해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변신했다. 매켄로는 “뇌를 전부 쓰고 싶었다. 테니스 외에도 연기나 음악을 하면 뇌의 다른 부분을 자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매켄로가 가장 잘하는 건 테니스다. 그는 TV해설가 및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한국 선수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세계랭킹 126위 정현(20·한체대)에 대해서는 “아시아권 선수 가운데 기량이 가장 돋보인다. 장래가 밝다”며 “내가 정현의 풀타임 코치를 맡기는 어렵다. 그의 강한 스트로크를 받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파트타임 코치 정도는 가능하다”고 했다. 또 청각장애인 이덕희(18·마포고·151위)에게는 “공이 땅에 닿는 소리, 라켓에 맞는 소리를 듣는게 중요한데 이덕희는 그걸 못해서 안타깝다. 공을 눈으로 보는 것에 신경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매켄로는 이번 대회에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12일 1회전에서 80년대 세계랭킹 4위에 올랐던 패트 캐시(51·호주)를 세트 스코어 2-0으로 꺾었다. 13일 열린 결승전에서는 스물한 살이나 어린 마라트 사핀(36·러시아)에게 0-2로 졌다. 그래도 매켄로는 시속 145㎞를 넘나드는 강서브를 간간히 구사하며 테니스 팬들을 놀라게 했다. 준우승을 차지한 매켄로는 “24년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테니스를 치는 모습을 한국팬들에게 보여드리겠다”고 말하고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글=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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