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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끊게 만드는 지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05호 34면

1.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은 자신을 알아주는 진실한 벗, 지음의 죽음을 슬퍼하는 고사성어입니다.


2. 대머리 아저씨와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게 대머리 아저씨 혐오가 있다든지 대머리 공포증이 있다든지 그런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바로 대머리 아저씨인 걸요. 물론 자신을 혐오하거나 무서워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저는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심오하지 않아요. 그냥 제가 대머리라서 그래요. 제가 대머리 아저씨라서요.


3. 제가 박찬우 본부장을 처음 만난 건 2008년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비즈니스 블로그를 제대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말하자 서민정 부장이 그렇다면 전문가를 만나보라며 그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언젠가 동료들 따라 사주카페에 갔을 때 2008년에 저에게 큰 행운이 찾아올 거라는 말을 듣고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박 본부장을 만나 컨설팅을 받은 것이야말로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받았으니까요.


지금 당장이라도 연락해 그를 만난다면 틀림없이 공부가 될 것입니다만 저는 그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가 저의 특징 중 하나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그도 대머리거든요. 만일 우리가 만난다면 다른 공통점이나 차이점은 모두 사라지고 단지 두 대머리 아저씨가 만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저는 수염을 기르는데요. 만일 제가 수염 기른 남자, 그러니까 대머리가 아니고 수염을 기른 누군가를 만난다면 저의 여러 특징 중 하나인 수염이 부각되고 수염 기른 남자로 간단히 분류되는 것처럼 말이죠.


4. 사람은 내가 누구인가도 중요하지만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해요. 그 사람이,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기도 하거든요. 그것이 간단한 오해든, 복잡한 이해든. 그래서 저는 올해가 가기 전에 박 본부장을 만나려고요.


5. 혹시 드라마 보세요? 드라만 보면 주인공이 있고, 조연으로 주인공의 친구가 나오는 경우가 많지요. 또 주인공은 대개 착하고 순수한 반면 친구는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지요. 친구는 주인공의 순수한 마음을 늘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 옆에서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줍니다. 끝없이 간섭하고 참견하고 조언을 해서 주인공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친구는 나쁜 친구처럼 보여요. 단지 역할이 그럴 뿐인데 말이죠. 친구는 주인공의 마음인데 말이죠. 또 다른 마음일 뿐인데 말이죠. 주인공이 직접 속마음을 혼잣말로 다 말하는 건 현대적이지 않지요. 현대적인 드라마에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나쁜 친구는 없어요. 있다면 내 마음의 나쁨이 있는 거죠. 있다면 내 마음의 나쁨을 나 대신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친구가 있을 뿐이죠.


6.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습니다. 전국시대 거문고 명인 백아에게는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종자기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하지요. 듣고 감상하는 귀가 대단히 발달한 사람이었나 봐요.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그 음률만 듣고도 연주하는 백아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았다고 합니다. 지금 백아가 기쁜지 슬픈지, 높은 산을 오르고 있는지 깊은 강을 떠내려가고 있는지 말이죠. 그러니까 종자기는 백아의 지음이었던 거죠. 그런 종자기가 갑자기 죽자 백아는 이제 세상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탄하며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아절현’은 자신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진실한 벗과 그런 우정에 대한 아름다운 고사지만 여기에는 혹시 다른 교훈이 있는 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는 지음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나를 알아주고, 내 마음의 소리를 알아듣고, 내 마음의 소리를 대변하는 사람, 지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백아절현’의 숨은 교훈은 아니었을까요. 결국 내 음악의 줄을, 내 존재의 줄을 끊게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음이었으니까요.


7. 그런데 정말 백아의 거문고 줄을 끊게 만든 사람은 종자기였을까요? ●


김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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