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화 감독의 재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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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L감독은 우리나라 영화감독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일류감독」이다.
최고의 영화상인 대종상 감독상도 받았고 흥행에서도 줄곧 성공해왔다. 어느덧 관객들은 그의 이름 석자만 보고도 영화를 보러갈 정도가 됐다.
그는 늘 새로운 감각의 영상을 시도한다. 그의 일련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비슷하거나 진부한 드라머는 거의 없다. 무거운 사회 드라머를 발표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화끈한 에로물을 내놓기도 한다.
작품에서 뿐 아니다. 개인 성격이나 행동거지도 다혈질이고 엉뚱한 구석이 많다. 그래서 별명이「낮도깨비」다.
이 L감독이 지난해 자신의 영화사를 세우더니 또다시 이색적인 형식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첫 작품이 흥행에서 크게 히트해 그는「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영화계에선 족히 2억∼3억원은 건졌으리라는 추산이다. 평생 그처럼 많은 돈을 만져보긴 처음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 많은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고 고민께나 했을법하다.
그러나 L감독은 돈 쓰는데도 남다른 구석이 있나보다. 그는 마치 자신이 큰돈을 벌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척척 써 나가기 시작했다.
선배 영화감독 작가론을 만들고 젊은 영화학도들을 모아 월급 줘가며 영화감독 연수를 시키기 시작했다. 또 M영화사 S회장과 아시아 영화감독 페스티벌 준비에 바쁘다.
「한국영화 작가론」시리즈의 첫 편으로는 임권택 감독을 선정, 그가 지금까지 만든 84편의 작품을 리뷰하고 젊은 영화학도들의 작품론 등으로 3백50여 페이지 분량의 본격적인 작가론을 펴낼 예정이다.
비용도 1천5백만원 가량 들지만 우리 영화사상 처음 시도하는 본격적인 작업이라 땀도 많이 흘려야한다.
그는 지난해말 영화학도 3명을 선발해 매달 생활비까지 대주며 3년 예정으로 현장교육을 시키고 있다. 지금이나 나중에나「조건」은 하나도 없다.
영화계는 이 같은 그의 행동을 놓고『뜻밖이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0여년 동안 여러 가지 특혜로 수십 수백억원을 번 영화사들은 많았지만 누구하나「이런데」재 투자한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얻은 것은 영화에 되돌려져야지요. 그 동안 꿈만 안고 있었는데 이제 힘이 조금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이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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