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법정에선 중3 「007미팅」

『여보세요! 미순양 있읍니까? 아! 듣기만 하세요』
전화속의 목소리는 은밀하고 다급했다.
『오늘 하오2시 종로2가 M분식센터앞에서 잡지를 둘둘 말아쥐고 있는 남학생을 만나보시죠」
『바른 발을 세번 구르면서 「배신당한 사나이」 라고 암호를 던져 남학생이 「벌레 먹은 장미」라고 회답하면 그가 바로 당신의 파트너 입니다』
딸깍.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어머머! 별꼴이야』
「비밀지령」을 받은 미순양은 한동안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수선스럽게 맵시를 내고는서둘러 집을 나선다.
지난 16일하오 서울YMCA친교실. 남녀중3 2백여명이 벌인 촌극 『청소년법정』의 한 장면이다. 피고는 「미팅」. 그가운데서도 「007미팅」을 묘사한 장면이다. 빵집을 들르고, 한적한 산책길을 찾아 정답게 팔짱도 끼어보고, 여의도에 가 사이클도 타보고…그런장면은 생략했다.
그밖에도 「식팅」(먹는 미팅), 「고팅」(고고 미팅),「반팅」(학급단위 미팅),「폰팅」(전화 미팅) 등 다양한 경험담이 관객의 폭소와 박수를 자아냈다. 여학생이 검사로 등장했다.
『청소년들이 피고인 미팅을 즐기는 장소는 주로 햄버거하우스나 빵집·카페. 방과후시간이 비교적 느긋한 토요일이나 휴일, 계절적으로는 들뜨기 쉬운 학년말에서 학기초에 특히 성행합니다』
『우-!』 방청석의 야유.
검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얼굴을 약간 붉히는 듯하던 여검사의 기소이유는 준엄했다. 『요즘 청소년들중에는 피고(미팅) 비용마련을 위해 거짓말로 돈을 타냄으로써 부모와 불신의 벽을 쌓고, 심지어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그밖에도 미팅의 악영향은 이루헤아릴수 없으며, 그 강한 해독은 주변으로의 파급효과도 엄청나므로 마땅히 처벌받아야 합니다』
잇달아 교사·학부모·청소년대상 유흥업소주인 학생등이 차례로 증인석에 앉았다. 검사와 변호사의 질문에 이들이 자신들의 체험과 견해, 목격담을 증언할 때마다 실내를 꽉메운 2백여학생과 교사·학부모들은 폭소와 박수를 터뜨렸다. 마침내 검사의 논고. 피고에 「무기한 자격정지」가 구형됐다.
『피고는 돈과 시간의 낭비, 불안과 초조, 가족간의 대화단절에 성적하락까지 초래합니다. 전혀 낯선 남녀학생들이 만나 수준 높고 피고가 표방하는 폭 넒은 대화란 빈말입니다』
『더구나 짧은 시간에 상대를 평가하다 보니 그의 내면보다는 키·용모등으로만 재는 잘못도 저지르게 됩니다. 게다가 그저 하루를 놀고먹자는 시간보내기식 만남을 되풀이 한다면 이성에대한 조금의 신비감마저 사라져 이성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풍조도 생기고…』
그러나 방청석의 「예비고교생」들은 압도적으로 변호사에 쏠리고 있었다.
『우선 남녀청소년들은 피고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지녀야할 태도를 배웁니다. 정서적 안정도 얻게돼 끝없이 시험에 시달리는 삭막한 생활이 윤택해집니다』
『와-』 함성과 박수.
『기성세대들도 건전한 이성교제는 인정한다지만 카페나 레스토랑에서라도 만나는 것은 적당한 장소를 마련하지못한 기성세대의 책임이 아니겠읍니까』
『요즘 청소년들은 피고가 건전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면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청소년들사이에 차츰 건전하게 정착돼가는 피고를 건전하게 발전할수 있도록 하는 일만 남았읍니다』
장내의 대세는 완전히 변호사의 편.
『땅, 땅, 땅-.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재판장은 변호사의 팔을 들었다.
재판장의 미팅 무죄선고에 신이 나서 박수를 치던 A군(14·서울Q중3)에게 『중3쯤 되면 누구나 미팅을 해보느냐』고 물어봤다.
『그야 모두 다르겠죠. 저는 연합고사가 끝난뒤 3번해봤는데 마음에 쏙 드는 여자친구는 못만났어요.』 아쉽다는 표정이다.
『부모님께 말씀을요? 과연 그걸 이해해주실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요? 그냥 적당히 둘러대죠. 반드시 나쁜짓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게 서로 편하니까요』
방청석에서 시종 미소만 짓던 서울z여중3학년 ×반담임 B교사(35·도덕)는 『학기중에도 많지만 요즘은 특히 007이 유행입니다. 자연발생적인것 아니겠읍니까. 말리려 들지말고 건전하게 지도를 해야죠』라고 말한다. <김경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