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은 증거인정에 신중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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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종철군사건을 계기로 국민기본권의 보장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뜨겁게 높아졌다.
이번 사건을 일과성의 일로 끝내지말고 고문등 가혹행위를 추방,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국민기본권 보장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는게 모든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대법원판사재임중 국민기본권문제에 큰관심과 공적을 남긴 이회창변호사(52·86년 4월퇴임)를 이두석 본사사회부장이 만나 기본권보호문제와 사법부의 바람직한 역할등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변호사는 재임중 가장 많은 소수의견(10건)을 내 「소수의견판사」로 이름났으며 항상 약자의 편에 선 판결로 유명했고 법이론에 관한한 소신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또 진취적이고 명쾌한 법이론으로 가장 많은 원심파기 기록과 함께 중요 공안사건을 기본권침해를 이유로 과감히 파기해 주목을 받았다. <편집자주>
- 이두석사회부장=박군 사건을 처음 들었을때 어떤 느낌이 들었읍니까.
▲이회창변호사=무척 충격을 받았습니다. 분노도 금할수 없었고요. 기본권에 관한 인식이 위정자를 비롯한 그들에게 제대로 안돼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읍니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겠읍니다.
- 이부장=재조에 계실때 특히 기본권 보호를 위한 획기적인 판결을 많이 남기신 걸로 알고 있읍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남북대치상황등올 이유로 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특히 공안사건의 경우 문제가 더욱 있지 않습니까.
▲이변호사=연초 사법연수원생들에게 「선배법조인과의 대화」시간에 바로 이문제를 얘기했읍니다.
통치조직으로서의 국가와 국민의 기본권이 비교될때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하는 것이죠.대부분 「국가가 없으면 기본권이 없지 않느냐」는 측면에서 국가가 중요하다고 얘기하지만 저는 이논리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기본권이 없는 국가는 생각할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와 기본권 둘다 필요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우위는 기본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통치권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의 기본권」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것같아 안타깝습니다.
옳은 비유일지 모르지만 공장이 국가(통치조직)라면 그속의 기계는 기본권에 해당하는데 공장전체의 핵은 역시 기계가 아니겠습니까. 특히 위정자들과 사법부 종사자들은 통치조직보다 기본권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해야합니다.
- 이부장=고문문제도 결국 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수사관계 고위당국자들이 기본권에 관해 어떤 관념을 갖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박군사건이후 고문방지기구를 신설한다고 하는데 과연 효과가 있겠읍니까.
▲이변호사=현행법에도 고문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고문방지는 감시조직이 있어서 되는게 아닙니다. 수사관들의 기본권에 대한 인식-「절대불가침」이 아니고 적당히 제한·침해해도 괜찮다는-이 바뀌어야하고 상급자들 의무분별한 독려와 공명심 조장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2·제3의 박군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수 없지요.
- 이부장=고문방지등 기본권보호문제는 수사기관뿐 아니라 사법부도 견제기능이 있는 만큼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독나무 열매」이론과 「미란다 판결」 등 사법부에서 판결로 불법수사를 없애는 전기를 마련, 수사기관을 이끈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우 리나라의 사법부가 과연 가혹수사를 없애고 인권보장을 하는데 필요한 노력을 했다고 보십니까.
▲이변호사=지금까지도 그렇게해왔지만 사법부에서 증거능력의 인정에 더욱 신중해야할것 같습니다. 법에 임의성 없는 자백의 증거능력을 배제토록 한 취지는 첫째 허위증거의 배제, 둘째 인권옹호, 세째 적법절차의 확보등3가지 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를 증시해서 임의성이 없어도 진실할 때에는 그대로 받아주는 경우가 많더군요. 즉 진범을 잡는다면 그 과정을 무시해 고문을 해도 괜찮다는 구실이지요.
이젠 증거의 허위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과정의 적법성이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증거능력이 없다는 쪽으로 가야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또 고문방지를 위해서는 수사단계에서의 변호인입회가 절대 필요합니다. 대개 고문은 수사과정에서 이뤄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재판과정의 국선변호인제도만 의무화되어 있을뿐입니다.
미국 얘기를 하셨지만 미국법원의 기본권 보장판결이 하루아침에 이뤄진게 아닙니다. 모두 그들 나름대로의 쟁취의 역사가 있읍니다.
이부장=최근들어 재정신청이나 재판부기피신청이 늘고있는데 이는 결국 국민들이 검찰이나 사법부를 믿지 못하기 때문 아닙니까. 이사건이 나자 검찰은 부천서 사건의 교훈을 살려 명예를 걸고 파헤치겠다고 했읍니다만 24일의 발표를 본 국민들의 반응이 의문이 확 걷히는 표정만은 아닌 것 같읍니다. 검찰과 법원의 신뢰회복이 시급하지 않습니까.
▲이변호사=검찰은 이사건의 전부가 그것뿐이라고 봤겠지요 (웃음).
법원은 제친정과 같아 잘못이 있다면 저에게도 책임이 큽니다. 그래서 언행이나 처신이 더욱 어려워 일체의 인터뷰도 피해왔읍니다만….
저는 사법연수생들에게 기본권얘기와 사법의 적극주의를 강조했읍니다. 요약하면 사법의 견제기능과 기본권 보호기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입법과 행정은 하나라고 봐야하고 결국 견제는 법원이 해야지요.
또 사법심사범위를 확장해 위헌심사권도 법원으로 찾아와야 하고 계엄이나 비상조치등 통치기능에 대한 심사권도 가져야 합니다. 즉 정의실현을 위한 적극개입자세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이 진정서를 들고 데모를 한다는 것은 결국 법원이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봐야지요.
- 이부장=혹시 법관시절 외풍을 받아보거나 의식해보신 적은 없읍니까. 법원이 외풍때문에 움츠러들었다는 견해도 많습니다만….
▲이변호사=제자신은 외풍을 받거나 의식해서 판결해보지는 않았읍니다. 외풍을 받는다기 보다 판결결과나 영향력을 미리 의식해서 「과천부터 기는」 일은 없어야 겠지요.
- 이부장=끝으로 사법부의 발전이나 후배법관들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이변호사=법관은 정의의 관념을 확립해야 올바른 판결을 할수 있읍니다. 사건마다 불가피한사정을 고려하다보면 거기에 빠져서 정의롭지 못한 결론읕 내리기가 쉽지요. 법관은 절차적인 정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실체적 정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목적이나 결과가 정당하다고 해서 부정한 방법이 합법화될 수는 결코 없읍니다.
(이변호사는 퇴임 9개월밖에 안됐지만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또 법관직은 자신의 정의관을 표현할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란 점을 강조한뒤 민주화의 요체는 사법권의 보장과 언론자유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변호사는 재야 변호사단체의 활동도 강조했지만 말끝마다 사법부에 대한 강하고 따뜻한 애정을 나타내 그는 역시 「타고난 법관」이란 인상을 지울수 없었다.) <기록=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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