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백두산 - 여명(제1장) - 하늘과 대지(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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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그렇게 하지. 나도 별 도리가 없었네. 자넨 벌써 맏이를 잃었잖나. 이렇게대신 나서준다니 얼마나 고마운가.
십장은 덕이가 나서는 바람에 남의 음식에 인정 쓰듯이 하호아비에게 말하였다. 아비는 그제사 소매로 두 눈을 씻었다.
젊다면 내라도 나가겠지만, 아무리 네가 내 혈육이 아니라고 죽으러 가라겠느냐. 저 놈을 깨워서 데러가게.
그러나 어미는 아이들의 등 위로 옆드려 두 팔로 감싸안고 흐느꼈다.
안됩니다. 이 연약한 살에 어찌 굿칼을 맞겠어요. 절대로 못줍니다.
덕이는 스스로 밖으로 나왔다. 십장이 따라 나왔지만 아비는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그는 백장의 처소로 끌려갔다. 백장은 십장과 함께 들어서는 덕이를 보자 어처구니가 없는지 멀뚱히 바라보다가 십강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지금 무슨 장난하는 게냐? 이 자는 어린 아이가 아냐. 누가 보더라도 장성한 하호가 아닌가.
자기가 자청을 하였읍니다. 그집에서는 얼마전에 이미 한 아들을 사냥에서 잃었읍니다.
백장은 덕이를 아래 위로 훑어 보고 주위를 맴돌아보더니 골똘히 생각해보는 꼴이었다.
몇 살이야?
덕이는 잠깐 숨을 삼켰다. 열여섯이라 대답하기 전에 참았다가 다섯살을 꿀꺽 하기로 켤정하였던 것이다.
열한살이올시다.
그래, 꼭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
예, 돼지나 조 이삭도 남보다 잘 자란 것이 있는 법 아닙니까.
백장은 덕이의 이상스럽게 천연덕스러운 태도가 못내 미덥지않은 모양이었다.
꼭 사흘 밤 낮이다. 그 뒤에는 너는 상석에 올라가 칼 맞고 죽게 된다.
덕이는 묵묵히 서 있었다. 백장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모르겠다. 어서 데리고 나가서 깨끗히 목욕 시키고 새옷입혀서 기다리게 해라.
십장이 뒤채로 돌아가니 다른하호들이 큰 독에 물을 데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덕이가 머뭇거리기도 전에 하호 장정들이 달러들어 그의 옷을 벗기고 독안에 집어넣었다. 물에는 데우기전에 던져 넣었던 쑥잎과 온갖향내 나는 풀들이 풀어져서 그득하였다. 장정들은 굳어진 얼굴로 덕이를 조심스럽게 씻기고나서 준비하여 두었던 새옷을 입혀주었다. 머리는 틀어 올려 뭉뚝하게 묶어 주고 두건을 씌웠고 허리에는 구리가 장식된 띠를 매어주고 발에다 가죽 신을 신겼다.
앞에 백장이 말 타고 갔으며 덕이가 뒤를 따랐고 덕이의 좌우에는 장창을 빗겨 든 기마 군사 네 사람이 따라갔다. 덕이는마상에서 몇달동안 살아온 하호마을을 뒤돌아 보았다. 하호들이 나와서 어두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섯의 밭처럼 보이는 하호들의 마을은 들판의 이곳 저곳에 끊임없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덕이가 처음에 끌려왔을 때에 전혀 눈에 들어오지않던 낯선 경작지와 개간지며 여자들이 수공 일을 하는 곳과 가축들을 돌보는 아이들의 여러 모습들을 그는 한 눈에 둘러 보았다. 그들은 바깥 돌담을 지나서 읍내로 들어갔다. 읍내의 평민들이 덕이를 손가락질 하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덕이는 읍의 외곽 안에 지어진 돌담 앞으로 다가갔다. 성문 앞에는 칼 차고 창을 세워 든 군사 한 쌍이 지켜섰고 문 뒤편에는 활을 메고 검을 움켜쥔 감사 한 오가 서있었다. 백장이 성문을 지키는 십장에게 말했다.
제물이다. 동녀는 봤는가? 네,벌써 도착했읍니다.
겹으로 된 높은 돌벽 안에는 너른 마당이 있었고 호장의 집과 군사들의 숙소로 지은 길다란 집들이 보였다. 십장이 달려나와 덕이를 넘겨받았다. 십장과 두 사람의 군사는 덕이를 두꺼운 토벽으로 지어진 초가집 앞으로 데려가더니 통나무 문짝을열고 안에다 밀어넣었다. 그들은 덕이에게 아무 말도 시키지않았다. 안이 어두컴컴하여 잠깐동안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덕이는 흙 벽에 등을 대고 다리를 쭉 펴고앉았다. 지난 몇달동안의 일들이 지나쳐가더니, 제일 먼저 동호의 촌락에서 자기를 따라나오라고 손을 흔들며 몸부림 치던 아름이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불에 타던 마을과 정다운 친척들의 주검이며 아버지의 참혹한 시신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덕이는 멍하니 통나무 밖으로 몇 뼘쯤 내다뵈는 하늘만 바라보았을뿐 슬프다는 느낌도 갖지 않았다.
얼마나되었을까. 덕이는 뭔가 이상한 기척에 눈을 떴다. 키득키득 하는 웃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리는듯하였다. 주워를 둘러보니 이미 밖은 캄캄했다. 딸랑거리는 맑은 소리도 들려왔다. 덕이는 바짝 두귀에 신경을 모으고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으려고 하였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차츰 가까와졌는데 그것은 구리방울이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시커먼 그림자가 출입문 위의 구멍 사이로 고개를 내밀더니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계속해서 방울을 흔들었다. 나중에야 그가 상호들 가운데 가장 힘있는 우두머리인 사제자 박사라는 것을 알았다. 덕이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그 방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방울이 딸랑거릴 때마다 등줄기로 어름이 지나가는듯하고 머리 끝이 서는 느낌이었다. 방울 소리가 차츰 멀어져갔다. 그러나 고개를들자 이번에는 어둠 속에서 다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덕이는 흙 벽에 귀를 바짝 들이댔다. 바로 벽 저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덕이는 벽을 쿵쿵 두드리면서 물었다.
거기 누구 있오?
울음소리가 멎더니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덕이가 다시 물었다.
나는 제물로 끌려온 동남인데 거기는 동녀가 아니오?
가까스로 대답이 나왔다.
네, 그래요 무서워 죽겠어요.
괜찮아. 사흘동안은 아무 일없다구 그랬으니까.
하호 마을에서 왔어요?
그래요, 개간지에서 왔지.
나는 가축 방목지에서 왔어요. 십장이 데려왔어요. 엄마가 보고싶어요. 배고파요, 무서워요.
어린 아이는 한꺼번에 많은 말을 쏟아냈다.
울지 말아요. 내가 노래를 해줄께.
덕이가 다급해서 아무렇게나 말했지만 여자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덕이는 흙 벽에 등을 붙이고 허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아주 작게 그의 마음 속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같았다. 큰 별 작은 별 어둡고 밝아, 이 세상 꽃들은 어디서 봤을까, 피고 지고 또한 싹이 트나니, 이 모두가 하늘의 지음이라지, 우리도 집안 이루어, 하늘의 별 같은 식구 될거야. 개나 소처럼 전혀 울지않던 덕이의 살갗 위로 스물스물 뜨거운 것이 솟더니 주루루 흘러버렸다. 저 말모루에서 갈래로 돌아오던 밤에 광야에 누워서 아름이가 불러주던 그 노래였다. 덕이는 흐르는 눈물을 막지도 않고 아름다운 말모루 처녀들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산에는 달래꽃, 들에는 푸른 풀, 이 땅 위 어느 곳에, 당신은 있었을까, 지금껏 알지못한 당신은, 어찌하여 오늘에사 만나게 되었을까. 누나 같은 아름이의 손길이 지금도 덕이의 못 박힌 손바닥 곳곳에 남아 있는듯 하여 덕이는 두 손을 엇갈려 겨드랑이에 끼우고 꼭 죄었다.
또 노래 해줘요. 나는 그런 노래는 세상에서 처음이어요.
여자 아이가 말했지만 덕이는한참이나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제 싸움터에 나가 돌아가셨고 오빠도 죽었어요. 엄마와 언니들만 마을에 살아요. 엄마는 저 산꼭대기에 하늘로 가는 다리가 놓였대요. 죽으면 그리로 간다지요.
어느 부족 사람이오?
덕이가 물었지만 아이는 잘 모르고 있었다.
예족의 하호 마을에서 살아요.
아니 그 전에 어느 부족 사람이었오. 날때부터 하호란 말인가?
저는 다른 데는 몰라요. 우리는 모두 하호예요. 온갖 세상만물도 더럽고 못난 것이 있고 귀하고 잘난 것이 있듯이 호장님도 계시고 상호님도 계시고 우리 같은 하호도 있대요.
그건 거짓말이야. 하호니 상호니 그런 것이 없는 마을도 많이 있어. 온 마을 사람들이 다똑같아. 모두 한 집안 친척들이지. 함께 일하고 가을에는 똑같이 나눠 먹지. 아이들은 장난질치고 청년들은 사냥하고 어른들은 농사 짓고, 벗들과 먼 고장으로 떠나기도 하고.
제 마음대로요?
그럼, 마음대로지. 하지만 일하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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