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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광화문광장 함성에 귀 기울여야

중앙일보

입력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대국민사과에도 불구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엔 5만여 명(경찰 추산, 주최 측은 20만 명 주장)이 넘는 인파로 뒤덮였다. 지난 주말보다 세 배가 넘는 인파다. 교복 차림의 중고생과 가족 단위로 시위 현장에 나온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불어났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거나 “우리가 주인이다”는 구호를 외치며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밤늦도록 촛불 행진을 벌였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 다수가 “질의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은 대통령의 담화에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며 4일의 대통령 사과 담화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돌파할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성난 민심을 잠재우는 데 역부족임이 입증된 셈이다.

정치권에선 그동안 대통령의 재사과와 수사 의지 천명→여야 영수회담→국회의 책임총리 추천→거국중립내각 출범이란 단계별 수습책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와 정반대로 응수함으로써 국민적 분노를 촉발시켰다. 민심은 더욱 격앙됐고, 일부 야당 인사들까지 공공연히 ‘대통령 하야’를 거론할 정도로 사정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권위와 도덕성마저 상실한 단계에 이르렀다. 국가적 위기 국면이 아닐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담화에서 야당이 요구한 특검을 받겠다는 입장만 내놨을 뿐 권력이양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돼선 안 된다”며 권력을 계속 쥐고 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렇게 민심과 동떨어진 소리를 하니 시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야당 일각에서 ‘대통령 하야’를 거론하는 등 격한 반응이 나오고 있어 ‘김병준 총리 카드’가 휴지가 돼버릴 공산이 커졌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역주행을 하는 것은 이번 사태의 책임자가 자신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의 함성은 박 대통령의 그런 마음을 간파한 민심의 발로라고 봐야 한다. 민심의 분노가 더욱 커짐에 따라 박 대통령이 국정 정상화를 위해 여야 대표와 만나겠다고 한 것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야당이 박 대통령의 영수회담 요구를 ‘국면 전환을 위한 꼼수’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집권 4년여 동안 비난을 받아온 일방통행식 불통 스타일을 바꾸지 않는 한 박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한 국정 공백의 책임은 민심을 역주행해 사태를 악화시킨 박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다.

5%대까지 떨어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민주화 이후 최하를 기록했던 외환위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6%)을 밑돌고 있다. 핵심 지지층에서조차 ‘퇴진’ 목소리가 거세지는 판이다. 야당의 특검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정도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오산이다.
이제라도 박 대통령은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비상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김 총리 후보자 지명을 철회하고 야당과 협의해 새 책임총리를 지명하는 게 옳다. 대통령 스스로 2선 후퇴를 선언하고 여야의 지도자들과 만나 향후 정치 일정을 협의해야 한다. ▶새 총리에게 국정 운영 권한을 이양하고 ▶새누리당을 탈당한다고 약속함으로써 거국중립내각 합의를 끌어내기 바란다.

박 대통령은 4일 담화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변죽만 울리는 대응으로 민심을 악화시킬 게 아니라 과감히 권력을 내려놓고 야당에 진심으로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것만이 대통령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이다. 박 대통령은 광화문광장에 울려 퍼진 함성에 귀 기울여 더 이상 실기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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