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육성회의 뜻입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시험이 능사가 아니잖습니까. 어린 학생들을 시험으로만 다루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부를 수 있습니다.』
등등하던 부인네들의 기세가 잠시 뜸해진 틈을 타 교강은 간신히 자세를 되찾았다.
58세. 지방국립사대를 졸업하고 교직경력 올해로 34년. E중학은작년에 맡았다. 지난해는 그런대로 지나갔으나, 고교입시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올들어 학부모들의 압력이 버텨내기 어려울만큼 강해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여러말씀하실 필요없습니다. 매월1회 시험을 치르고 주요과목시험 2회를 추가해주세요. 이것은저희 육성회의 뜻입니다.』
5명의 부인네들은 보통의 학부모가 아니라 육성회 임원. 그들의 1시간에 가까운 추궁은 이같은 명령으로 끝났다.
『알겠읍니다. 그렇게하지요.』 K교장은 시험이 능사가 아니라는 신념을 깨끗이 철회하고 백기를들었다.
K교장으로서는 1년에 5백여만원을 내놓는 육성회 임원들의뜻을 거역할수 없었다. 학교경영도 그렇지만, 이들이 끌고 가는지역사회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
봄바람이 제법 훈훈해진 지난5월11일 아침8시10분쯤. 서울 강북 M고교. 마침 등교시간의 학교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소란했다.
바로 전날 1학기중간고사를 끝낸 2학년×반 H군(16)이 숨진채로 본관건물 앞 뜰에서 발견됐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러온 부모는 아들의 시체앞에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출근길의 교사나 등교길의 동료들은 H군을 알아보고 한결같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H군이 학급에서는 늘1등이었고, 전교에서도 항상 10위이내에만 머물던 선망의 대상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H군의 죽음이 주위를 더욱 놀라게한 것은 자살이나 타살도 아닌 실족추락사였다는 사실이었다. 커튼을 찢어만든 밧줄이 2학년×반교실의 창틀에 매달러 아래로 드리워져있었다. 교실은 6층. 바로 아래층이 교무실이다.
현장주변을 조사한 경찰은 H군의 사망시간을 새벽2∼3시쯤으로 추정했다. 그 시간에 자기반교실에서 밧줄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러오다 추락, 숨졌다는것.
H군은 왜 심야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무실로 침입하려했을까. 추리만 가능할뿐 아무도확실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부모에 따르면 H군은 이날도평소처럼 새벽1시까지 자기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1등을 하면서도 한 과목이라도망치면 내신이 휘청거리게되고 좋은 대학에 못간다며 조바심을 하더니만….』 어머니는 오열했다.
H군이 전날 영어시험을 망쳤다고 고민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수업이 시작된 뒤였다. 학교측은 결국 H군이 교무실에둔 영어시험 답안지를 고치려고 하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풀이했고 동료들도 그렇게받아들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