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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죽는다" 서로 꼬집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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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살아남은 해풍호 선원9명이 버텨낸 4일19시간.
추위와 굶주림 속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며 서로를 격려, 초인적인 의지로 살아 남은 인간승리의 드라머였다.
다음은 본사 주일 최철주특파원이 선장 곽철수씨와 만나 밝혀낸 표류기.
◇조난=19일 낮12시. 우리들이 탄 제7해풍호는 독봉 동남방 35마일 해상에서 야간작업에 대비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고 높이 5∼6m되는 파도가 밀어닥쳤다.
순간 우리는 수심이 깊은 서쪽 안전지대로 옮기려고 앵커를 올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파도는 순식간에 7∼8m짜리로 높아지고 사정없이 배를 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뱃전을 넘어 들어온 바닷물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배수관의 마개가 고장난 것이다.
이 순간 세 번째 파도가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선실이 감길 정도로 바닷물이 들어왔고 배가 한바탕 기우뚱거렸다. 순간적으로 배가 침몰한다는 직감을 느꼈다.
나는 급히 SOS를 치게 하고 긴급 탈출명령을 내리고 15인승 구명보트 1개를 바다에 던졌다.
이 보트는 던지면서 줄을 당기면 자동적으로 바람이 들어가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바람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서두르느라 안전핀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25인승 구명보트를 바다에 던졌다. 그런데 이 보트 마저 꾀어 있어서 3분의1밖에 펴지지 않았다.
나는 『모두 침착하게 기다리라』 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성미 급한 선원들은 선장인 나의 명령을 어기고 스티로폴이나 물통을 껴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들은 바로 우리들의 눈앞에서 파도에 휩싸여 자취를 감췄다.
내 명령에 따라 구명보트가 펴질 때까지 기울어 가는 배에 남아있던 사람은 이번에 살아남은 9명.
◇표류=상황이 더욱 다급해지자 우리는 반쯤 펴진 보트에 옮겨 탔다. 구명보트에는 2개의 노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폭풍으로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다.
동해가 칠흑같이 어두워지면서 다시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닥쳤다. 몇몇 선원들은 너무 지친 탓인지 추위 속에서도 졸기 시작했다.
『졸면 모두 죽는다. 잠을 깨!』나는 큰소리를 지르고 조는 선원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20일 날이 밝아서야 겨우 바닷바람이 잔잔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었다.
구명보트에 넣어둔 미싯가루로 만든 건빵 약간이 우리들의 유일한 비상식량이었다.
나는 이 비상식량 마저 떨어지면 「모두 끝장」이라 생각하고 작은 성냥갑 만한 건빵 1개씩을 배급했다. 이것이 하루 식량이었다.
그러나 목이 너무 말라 건빵 마저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30여년 어부생활을 해오면서 때때로 바닷물을 마시는 연습을 해왔다. 그러나 막상 바닷물을 식수 삼아 건빵을 먹었더니 곧 복통이 일어났다. 나는 다른 선원들에게 바닷물을 마시지 말라고 명령했다.
21일 하오 소나기가 내렸다. 대부분 내복차림이었으나 비에 젖은 내의를 벗어 물을 짜 입안에 넣었다.
어떤 선원은 손톱 만한 건빵 한쪽을 입에 넣고 비에 젖은 팬티를 입으로 빨아 목을 축였다. 그래도 갈증이 심해 목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죽지 않으려면 빨아 먹으라』 고 소리쳤다.
21일 밤. 모두들 눈이 희멀겋게 됐다. 정신들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서로 등을 대고 몸부림치도록 지시했다. 조는 사람은 꼬집어주라고 했다. 『졸면 죽는다. 내말 안 들으면 죽는다』 고 을러대고 때로는 달래기도 했다.
22일. 낮에 우리들 머리위로 비행기가 날아갔다. 입고있던 팬티와 트레이닝복을 모두 벗어 흔들어대며『사람 살려라』 고 소리쳤다. 그러나 허사였다.
이날 저녁에는 보트에 있던 노2개를 연결하고 그 끝에 나일론천울 잘라매 돛대를 만들어 세웠다. 구명보트가 좀더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밤에는 수중에서 쓰는 4V짜리 비상라이트를 고무보트에 부착하여 켜놓고 누군가 우리를 구조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여섯 시간 뒤에는 라이트마저 수명이 다해 꺼졌다.
보트로 탈출할 때 보트 끈에 발이 얽혀 크게 상처를 입은 박성대 선원 (47)이 제일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나흘이 되도록 아무 것도 먹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갈증을 이기지 못해 바닷물을 마신 탓으로 보트 안에서 대변을 보기까지 했다.
◇구조=23일 새벽. 멀리 섬이 보였다. 망망대해를 떠돌다 섬을 보니 눈물이 솟았다. 나는 그 섬이 미시마 (삼도) 가 아닌가 생각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행운은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바람이 거꾸로 불어 보트는 점점 반대쪽으로 갔다. 섬은 보이는데 갈 수가 없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라고 소리질렀다. 그것은 인간의 소리라기 보다는 동물의 신음소리였다.
그러나 하늘은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배리지 않았다. 24일 아침 멀리서 배 한 척이 가물가물 나타났다.
우리들은 또다시 모두 일어나 옷을 벗어들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배는 오린지 빛깔의 우리 보트를 알아보고 다가봤다. 일본 아오모리 (청삼) 현 어협 소속의 제21장영구이었다. 선원들은 우리를 하나하나 배로 끌어올렸다.
뒤이어 일본해상 보안청의 구조헬기와 순시선이 달려왔다.『하느님, 감사합니다』모두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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