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살다] (33) 생사 갈림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토왕폭 정상에서 이해관 대원과 길고 긴 밤을 하얗게 지샌 장경덕 대장은 속초 시내의 불빛이 흐릿해질 무렵 전날 밤 후배들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던 토왕의 정수리께로 다시 갔다.

여전히 후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중단 설사면을 내려다보니 몇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온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더니 그들의 응답이 들려왔다.

"경덕이형, 나 백승기요. 후배들이 추락했어요. 추락."

악우회의 백승기 대원은 이어 "한 대원은 중단 위쪽에, 다른 한 대원은 중단 아래쪽에 떨어졌다"고 알려줬다. 동료들이 추락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주저앉은 이해관 대원을 부축해 장대장은 급히 우측 능선을 타고 백대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악우회의 윤대표 대장과 백대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장대장은 중단 설사면 위쪽에 떨어진 대원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김성택 대원이었다. 김대원의 눈자위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헬멧은 반쯤 벗겨진 채 깨져 있었다.

이미 숨이 끊긴 상태였다. 장대장은 김대원의 눈을 감겨준 뒤 김대원보다 더 아래쪽으로 떨어졌다는 송원기 대원을 찾았다. 그러나 송대원은 그곳에 없었다. 후배의 주검을 찾는 그에게 백대원이 소리쳤다.

"경덕이형, 나도 정신이 나가 깜빡했네. 원기는 살았어요. 다치지도 않았어요. 형 팀의 후배들이 조금 전 베이스캠프로 옮겼어요."

베이스캠프로 급히 내려가 송대원과 눈물로 재회한 장대장은 의사로서 송대원을 진찰해봤지만 50층 건물 높이인 1백50여m 위에서 추락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전혀 다친 데가 없었다.

"볼트를 치려는 순간 몸이 붕 떠면서 곧바로 의식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중단 설사면이지 뭐예요."

김성택 대원의 추락에 따른 충격으로 확보줄을 건 소나무와 두 개의 하켄이 모두 부러지고 빠져나가면서 송대원도 뒤따라 떨어진 것이다. 김대원이 그렇게 낚아채듯 끌어당긴 게 결과적으로는 송대원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수직으로 떨어진 김대원은 절벽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바위에 잇따라 부딪친 데다 가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경사가 완만한 바위벽에 추락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송대원은 김대원의 추락으로 인한 충격이 원심력으로 작용해 둥근 원주를 그리며 떨어졌다. 때문에 송대원은 추락 중에 바위와 전혀 부딪치지 않은 데다 바위벽이 아닌 가파른 설사면으로 내려앉듯 떨어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권금산장의 유창서씨, 거리회의 장봉완씨, 요델클럽의 백인상씨, 악우회의 윤대장과 유한규.백승기 대원의 도움을 받아 장대장은 김대원의 유해를 설악동으로 옮겼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