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편짜기」는 떳떳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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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기국회가 허망하게 끝나고 정국은 뭐가 뭔지 모를 뒤죽박죽 상태로 새해를 맞게됐다. 합의 개헌은 이제 영 가망 없는 건지, 그렇다면 이른바 합법 개헌은 되는 건지, 아니면 개헌이 안될 가능성도 있는지 통 전망하기 어렵다. 또, 끊임없이 나돌고 있는 위기설·비상 조치설은 어느 정도의 근거라도 있는지, 단순 유언비어로 흘려 버려도 괜찮은지 역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이런 정치문제에 대해 이처럼 아무것도 전망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의 정치상황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비정상이며 문제가 심각한가를 웅변하는 것이다. 정치상황이 불안하니까 정국 전망에 대한 수요도 커진다. 연말의 잦은 모임에서는 으례 화제가 「정치가 어떻게 되느냐」 「개헌은 되느냐 안 되느냐」는 것이고, 정치인이나 정치부기자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좌중을 만족시키는 시원스런 대답을 못하는 실정이다.
여야가 아직 공식적으로는 합의개헌을 포기했다고 나오지는 않고 있다. 민정당 쪽에서는 한때 합의개헌이 안 될 경우 다른 최선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등의 표현으로 독자적인 개헌추진의사를 밝히기도 했지만 다시 합의개헌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공식 입장으로 되돌아갔다.
신민당 쪽에서도 전보다 뜸하긴 하지만 여전히 합의 개헌을 추구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저께만 해도 김영삼 고문이 이만섭 국민당 총재를 만나 합의 개헌을 다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여야가 정말 합의개헌을 추구하고 있다고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해 나가다가 운수 좋게 잘되면 합의 개헌을 하겠다는 정도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 실은 민정당 쪽에서는 이미 합법개헌을 추구하는게 명백하고 신민당 역시 이를 알아차리고 나름대로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정국은 합법 개헌이 되느냐 안 되느냐, 된다면 어떤 모양으로 되느냐가 초점일수 밖에 없고 정국의 명암·정계의 판도도 이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합법 개헌은 재적 의원 3분의2라는 개헌선 확보가 열쇠다. 1백47석의 민정당이 1백83석의 개헌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최소한 36명을 끌어와야 한다. 내각 책임제를 지지하는 민중민주당(12)과 무소속 1명을 생각하면 확보된 세력은 1백60석이 되므로 23명을 더 끌어와야 하는데 이 작업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여권 간부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하는 이도 있고 『문제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들의 비공식 견해에 따르면 직선제를 당론으로 하고있는 국민당(21) 민한당(3) 신민당(90)내에서 충분한 동조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대해 신민당 쪽은 소속의원의 결속, 타당과의 연대, 국민여론 고취 등으로 저지전략을 짤 수밖에 없는데 가장 문제는 방어율(?)을 얼마나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비 내각제 1백14석 중 20%만 이탈해도 저지는 안 된다. 이미 일부 군소정당 의원들은 개인적으로 내각제 지지의사를 숨기지 않고 있고 신민당 내부 역시 1백% 장담하기 어렵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야당 내에서는 저지 비관론이 적지 않고 벌써 내각제 개헌을 기정사실로 한 공개적인 국회의원 선거 걱정도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민정당이 손쉽게 개헌 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1명이 모자라도 안되니까. 민정당의 가장 큰 어려운 점은 내심의 동조자에게 어떤 명분을 줘야 떳떳한 공개적인 동조자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불투명하긴 하지만 내각제 세력의 개헌선 확보노력과 비 내각제 세력의 저지노력이 앞으로 정치의 중심 테마가 되고, 조건과 명분에 따라 편짜기를 달리하는 설득과 타협·흥정이 무성할 것으로 일단 전망해 볼 수 있다.
여권에서는 비교적 일사불란하게 개헌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겠지만 비 내각제 진영에서는 공천·재선 가능성 등 이해관계와 입장에 따라 △적극저지 △소극저지 △동조 등으로 다른 양상을 보일 공산이 크다. 독자적인 합법개헌의 능력이 없는 야당으로서는 내각제 저지가 곧 직선제 관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내각제를 저지하면 전혀 원치 않는 현행헌법의 존속이라는 엉뚱한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논리도 매우 곤혹스런 문제다.
아무든 이 새로운 편짜기 과정이 앞으로의 정국전개의 핵심개념이 될 전망인데 이 과정이 비교적 순조롭게, 합리적으로 진행된다면 위기설 같은 것은 별로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번 신민당 서울대회의 봉쇄에서 보았듯이 실제 우리의 경찰능력으로는 정치상황이 불안하다고 하여 치안확보 문제를 우려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편짜기 과정이 어려워지면 정치 위기가 올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이상 살펴본 것이 이 전망하기 어려운 정국에 대한 기자의 어설픈 전망의 시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순조로운 편짜기가 이뤄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추진노력에 도덕성과 윤리성이 있어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처럼「변절」소리가 나오거나 특혜수수설이 나온다면 그런 확보작업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가능성이 많다. 그런 식으로 개헌 선을 확보해 개헌이 이뤄지더라도 정치안정은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정치인도 어느 편에서든 명분과 소신에 따른 떳떳한 결단을 내려야 하며 선거구민에게 항상 당당하게 자기 입장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야당도 저지를 표방하는 이상 저지이후의 정국 구도를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직선제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내각제를 저지한 후에도 민정당과 협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정당이 안 들으면 민중 봉기 노선밖에 없는데 그런 코스를 생각하는 야당인사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개헌은 돼야 하고, 좋은 모양으로 돼야 한다. 개헌 후 다시 개헌투쟁이 벌어지는 개헌이 돼서는 안 된다. 아직 시간은 많다. 【송진혁(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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