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말해도 소용없다”서 “바뀔 수 있다”…SNS 성추문 고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소설가 박범신(70), 시인 박진성(38), 미술관 큐레이터 함영준(38)씨 등의 성폭력 의혹이 잇따라 터지면서 문화계가 휘청하고 있다. 당사자들의 사과에도 파장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특정인의 문제를 넘어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남성중심적 문화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기사 이미지

이번에 불거진 성폭력 논란들의 양상은 유사하다. 관련 분야에서 기득권을 가진 남성이 지위를 이용해 직접적 이해관계에 놓인 여성 편집자, 작가 지망생, 예술대 학생 등에게 성희롱 혹은 성추행을 했다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첫 번째 피해 글이 올라온 다음, 유사한 피해를 봤다는 다른 피해자들의 ‘폭로’가 이어지는 것도 유사하다(박진성 시인과 함영준 큐레이터의 경우).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박진성 시인은 사흘 만에 사과와 활동 중단을 선언했지만 박범신 작가는 한나절도 못 돼 사과했다.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큐레이터 역시 “모든 직위를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박진성·박범신·함영준 사과에도
“기득권 이용 여성 비하” 비난 쇄도
나 혼자 겪는 일 아닌 것 알게 되며
집단 문제이자 사회현상으로 인식
전문가 “마녀사냥식 폭로는 우려”

문단 내 성폭력 문제는 지난달 계간지 ‘21세기 문학’ 가을호에 실린 김현 시인의 ‘질문 있습니다’란 글이 포문을 열었다. 남성인 김 시인은 이 글에서 “여성 문인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걸레 같은 X, 남자에게 몸 팔아 시 쓰는 X’이란 성적 비하 발언을 들어야 했고, 어떤 남자 시인들은 젊은 여자 후배들을 ‘꼴리는’ 순으로 점수를 매겼다”고 고백했다. 술만 취하면 “여자가 무슨 시를 쓰느냐”고 면박을 주거나 여성 시인이 따라준 맥주 컵에 소변보는 시늉을 하는 등 충격적인 사례를 익명으로 소개했다. 김 시인은 “문단 사람이라면 대개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왜 아직도 처벌받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가해자로 사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

최근 성폭력 논란은 남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앞서 19일에는 여성 웹툰 작가 이자혜(25)씨가 미성년자 성폭행을 방조하고 그 내용을 자신의 작품 ‘미지의 세계’의 소재로 삼았다는 폭로가 나왔다. 웹툰을 연재 중인 레진코믹스와 출판사 유어마인드는 즉각 연재 중단과 전량 회수를 결정했다. 이어 SNS에는 ‘#오타쿠_내_성폭력’ ‘#문단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 등 다양한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말해도 소용없다”에서 "바뀔 수 있다”로 인식이 바뀐 것이다.

한 여성 출판인은 “아직도 문학계는 남성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고 남성성을 과시하거나 성적 규범을 깨는 것이 예술가다움의 지표로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다. 나이 많은 남성이 어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성적인 에너지를 창작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용인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행동이 성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관련 기사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는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피해를 고발하고 나서는 흐름에 주목했다. “지난해 김태훈 팝칼럼니스트나 개그맨 장동민씨의 ‘여성 비하’ 발언부터 지난 5월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까지 일련의 흐름을 통해 여성들의 주체적 의식이 커졌다”며 “기존에는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거나 혼자 앓고 있던 것이 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이를 집단 문제이자 사회 현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그동안 콘텐트 공유의 개념으로 사용되던 해시태그가 ‘#내가샤를리다’ ‘#그래서최순실은?’ ‘#문단_내 성폭력’ 등으로 이어지며 의제 설정과 정치적 행동으로 확장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자칫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마녀사냥’ 폭로에 대해서는 경계의 목소리가 많다. 박범신 작가와 술자리에 동석한 여성 편집장 A씨는 24일 본지에 e메일을 보내 “부적절한 행동은 없었다”고 밝혔다. 개인의 상황과 시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