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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서 뉴요커가 만든 한국 전통소주 토끼? 토끼 만든 브랜든 힐을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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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병 소주를 마셨을 땐 아무 감흥이 없었어요. 그런데 전통방식으로 증류한 소주를 처음 마시자마자 그 깊은 맛과 품격에 반해버렸죠. 뉴욕 친구들에게 이런 소주가 세상에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직접 만들게 됐어요.”

영어로 ‘tokki’라 쓰고, 한국말로 ‘토끼’라고 읽히는 이름의 소주를 젊은 뉴요커가 만들었다. 지난 2월 뉴욕 브루클린에서 한국 전통방식으로 증류한 소주 ‘토끼’브랜드를 런칭한 브랜든 힐(33)이다. 찹쌀·물·효모로 만들고 누룩을 띄워 발효한 ‘토끼’는 현재 뉴욕 한식당을 중심으로 팔리면서 꽤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 지인에게 소개하려 ‘토끼’ 20병을 들고 방한한 그를 20일 오전 서울 지하철3호선 신사역 인근에서 만났다.

‘토끼’, 무슨 의미인가.
“한국에서 술 만드는 법을 배웠던 2011년이 토끼해라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당시 ‘수수보리 아카데미’(경기대 양조교육기관)에서 1년간 전통소주를 비롯해 청주·약주·막걸리 제조법을 배웠다. 미국에 돌아간 뒤 나만의 방식으로 전통소주 제조를 시작해 지난 2월 ‘토끼’를 출시했다. 내게 특별했던 해를 기념함과 동시에 달나라 옥토끼 설화 같은 한국의 전통을 담는 의미도 있다. 라벨의 토끼 그림은 한국 느낌이 물씬 나게 디자인했다.”
‘토끼’를 맛본 한국인들 반응은 어떤가.
“제대로 맛을 냈다고 칭찬해주더라.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쌀(캘리포니아산)과 그곳 물로 만든 것이라 걱정스러웠는데 한국 전통 술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진심이 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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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짜리 병에 담긴 ‘토끼’는 알코올 도수 23%다. “전통 누룩 향이 나면서 순하고 부드러워 잘 넘어간다”는 힐의 설명처럼 코 끝에 댔을 때 향이 은은했다. 23도로 느껴지지 않는 순한 맛에 기대다보면 어느새 아스라한 취기가 올라온다.

뉴욕에서 굳이 한국 전통소주를 만든 이유는.
“요즘 뉴욕에선 한식 인기가 대단하다. 어느 나라 음식이든 그 나라 전통술과 맞춰 먹어야 제일 좋은데, 뉴욕 식당에서 한국 고급 술을 만나기 쉽지 않다. 초록색병 소주는 화학작용을 거친 거라 고급스러운 느낌이 없다. ‘하이엔드(고급) 한식’에 어울리는 전통 술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게다가 ‘토끼’는 숙취가 별로 없다. 친구와 둘이서 12병을 마신 적 있는데 다음날 멀쩡했다. 하하.”
얼마나 팔리나.
“미쉐린(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정식’을 비롯해 뉴욕 음식점 25곳에 납품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주류판매점 25곳에서도 팔고 있다. 매달 생산량을 늘리는 중인데 지난달엔 총 70박스(1박스당 20병)를 생산했다. 혼자서 모든 작업을 다하고 있어서 일주일에 90시간씩 일하기에 힘들기도 하지만 사람들 반응이 좋아서 뿌듯하다.”
다른 한국 전통술도 만들어 봤나.
“만들어 본 것만 수백 가지이고, 계속 실험 중이다. 한인마트에서 더덕·인삼·오미자 등 재료를 구해 담근다. 막걸리도 수없이 만들었지만, 유통기한이 짧아 대량생산은 못하고 친구들끼리 돌려 마시기만 한다. 당분간은 ‘토끼’에 집중하면서 뉴욕을 넘어 다른 도시로도 판매를 확대하려 한다.”

힐은 18세 때부터 술 제조에 관심을 갖고 독학을 시작했다. 20대 때 다양한 증류소를 거치며 진·럼·보드카 등 제조 기술을 배웠고 7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각 나라 전통 술 제조와 문화를 접했다. 그러다 2011년 한국에 와서 한국 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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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술에 빠진 특별한 이유가 있나.
“술을 주거니 받거니 권하는 문화도 좋고, ‘발효’를 중심으로 한 술과 음식문화도 독특했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와 고도성장시대를 거치면서 전통 술이 말살 위기까지 갔는데도 묵묵히 전통을 이어온 장인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그런 ‘생존(survival)’ 스토리가 미국인들에게도 매력적이라고 봤다.”
한국에 역수출할 계획도 있나.
“관심은 있지만 관세·주세가 붙으면 너무 비싸져서 경쟁력이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혼자서 수출할 양을 다 만들 수도 없다. 다만 먼 훗날을 대비해 이번 방한기간 동안 한국에 ‘토끼’ 상표권 등록 작업을 하려한다. 언젠가 한국 쪽 파트너 업체와 ‘토끼’ 소주를 생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음 계획은 뭔가.
“음력 정월마다 특별한 한정판 ‘토끼’ 소주를 낼 거다. 내년이 닭띠 해인데, 음력 1월 한달 동안 ‘토끼’에다 닭 그림을 그린 라벨을 붙여 팔 계획이다. 그런 식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싶고, 뉴요커들에게 새로운 이야기거리를 선사하고 싶다.”

글=강혜란 기자, 사진=장진영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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