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11< 꼭두각시극 닮은「구구쓰」인형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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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휴가 (궁기현 일향) 시에서 특급열차로 동북해안을 따라 4시간쯤 달리면 나카쓰 (대분현 중률) 시에 닿는다.
손영사로부터 사전 연락을 받은 오선희씨 (한인교육위창회외) 가 마중나와 주었다.
오늘 보려고 하는것은 일본의대표적인 신궁의 하나인 자주팔번궁(대분현우주시)과 그 계열사인 팔번고표신사 (복강현 축상군 길부정) 및 고요신사 (대분현중률시 이등정) 에 지금도 전하는 구구쓰 (괴뢰자) 인형극.
중률시에서 자주까지는 차로 달려 또 1시간의 거리였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신궁이 이세신궁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나을신궁 (487년에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모셨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음)에 비하면 근1백년뒤에 세워진 것으로 일인학자 「마에카와」(전천명구) 같은 이는 그들 신궁의 기원을 한국에서 찾고 있기도하다.
그 다음으로 들수있는 신궁이 말하자면이 우좌팔번궁(일명 우좌신궁)이며, 이와 버금하는 것이 경도에 총본사를 두고있는 도하신사다.
여기서 필자의 흥미를 끈 것은 이들 신궁 가운데 자좌와 도하량사 모두 신라에서 귀화해간 진씨족에 의해 그들 씨신을 모시고 있다는 점과 신궁직에는 대대로「하다」(ハタ)라는 기씨성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이는 죽내리삼 외의 『일본사사전』 에도 나와있거니와 필자가 만난 우주 상궁의 권양맹 (신관)직에 있는 「고노」 (하야) 씨도 진씨성은 아니나 한국계의 피가 섞였을 것이라 말하며 이 사의 씨신은 본래 대장장이였다고 한다.)
「진」을 일본에서는 만요카나(만섭가명) 로는 「하다」 (ハタ)라 읽고 「파다」「파타」「팔전」혹은「번」「번다」라고 써서 우리말 「바다 (해)」와 같은 뜻으로 읽고 있다.
10세기께 나온『왜명류취초』에는 이러한 지명이 관동 관서는 물론 중국·사국·구주등 바다를 끼고 있는 굿에서는 흔히 보여지는 이름이라고한다.
예를 들면 출운이란곳은 「파다의향」, 백예는 「번」, 비전을 「번다의향」이라 하는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일대는 귀화인의 본고향을 이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진씨성을 이곳에서는 바다를 건너온 귀화인이며『일본서기』 가운데 나오는 「유쓰키」 (궁월の군)가 본래는 진씨족으로 지금의 경도지방 산성국에 집중하여 살고 있었는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의 하나인 『길비군사』 에 『산성은 사실상 진씨의 나라』 라 기록할 만큼 번성했던 주씨성의 세력을 보여준다.
다시 이들은 5세기초에 야마트 (대화) 대왕가를 따라 세도나이카이 (뇌호내해) 로 동진하여 바다 건너 이곳 푸셍 (풍전국) 에 정착하였다 한다.
대보2년 (702년) 의 이곳 호적대장에 의하면 총인구의 85%를 진씨가 접하고 있었다 하는데, 어쨌거나 신라에서 도래한 이들 주씨는 당시 일본의 수도인 나량을 중심으로 백제계인 한씨와 더불어 비조문화를 꽃피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다한 사실이 오늘날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이같은 예는 진씨족과 관련이 깊은 이곳 우좌팔번궁의 유물에서도 찾을수 있었다.
즉 일본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우좌신궁의 동종은 안내 팸플릿에서도 「조선종」이라 뚜렷이 밝히고 있다.
이는 한눈에 보아도 우리 신라종과 매우 닮았음을 느낄수가있다.
이는 필시 이사에 봉제된 진씨의 씨신이 원래 대장장이였다는 사실을 감안할때 여기에 안치된 이유가 드러난다.
이날밤 오선희씨와 함께 길부정의 팔번고표신사를 찾았다.
이곳은 중진에서 산국천이라는 내 하나를 경계로 하고 있는 복강현의 동쪽 끝에 위치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마침 이곳에서 이날밤 4년에 한번썩 연결되는 그들 전통인형극의 효시라는 구구쓰놀이의 연습이 있다고 한다.
이번에 우리 조사단을 초청해준 「다무라」 (전촌원징·구주역사자료관장) 교수의 연락을 받은 이곳 공민관의 광보실주간인「미야우치」 (궁내징천) 씨는 이곳 보존회 회원들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친절한 안내로 국가지정중요문화재인 47개의 인형이 안치된 봉안소 (이곳에는 어신의라하여 1천여점의 괴뢰의상이 진열돼 있고 한 옆에 목조녀신기수상이, 그 아래에 괴뢰들이 진열돼 있었다) 에서의 간단한 의식과 다시 이들을 신무전 (무대가 있는곳) 으로 옮기는 과정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들었다.
이 놀이를 일명 고요마이 (고표무), 또는 신스모 (신상박) 라고도 하는데 이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대부분 발가벗은 모습의 씨름춤이 전부라 할수 있었다.
인형은 마치 우리의「홍동지」를 닮았다.
인형극의 내용만 다를뿐, 그 조종수법과 무대전경이 우리 꼭둑각시극과 흡사했다.
일본어의 「구구스」가 우리말의「곡도」「꼭둑각시」 에서 유래되고 있음은 이미 알러진 사실인데, 여기에 어깨서 씨름놀이가 이놀이의 대표적인 주제냐 하는점이 의아했으나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그들 일본인이 신화를 재현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전회의 고천수야신악에서도 이미 말한바 있었지만, 이 또한 『고사기』 와 『일본서기』 가운데 나오는 어전상박의 이야기를 재현하고 또 앞서말한 우좌신궁과 관계되는 이곳중률지방의 신화를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마다이』 (사마대) 라는 금년 여름에 발행된 문화종합지에 의하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일전신사에는 씨름의 신인 영계(나가스레)를 모시고 있다 한다.
영계는 원래 대화정권의 대장사였던 신라인 진씨의 7대손으로, 그때(후삼조천황 1068∼72) 의 상박절회에서 일본의 강호를 물리쳐 일본 제일의 강자가 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씨름을 그들은「스마히」(수말비)라 불렀고 우리는「시름」으로 발음해 왔다.
그 자음은 동일한 것으로 우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씨름의 기원 역시 우리에게서 건너갔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현상의 모습을 두고 속단할수는 없으나 1천여년전부터 보존된 것이라는 고표신사및 점요신사의 구구쓰는 6세기께로 추정되는 고구려 각저총의 벽화에 나타난 씨름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는 상투 (개) 를 질렀으며, 웃통을 벗고 국부만 가린 그 모습은 『진서』 의 『마한의 여자는 폐주로써 머리를 장식하고 남자는상투 (개) 를 내놓았다 (…괴두노개 여경병) 』 는 기록과 일치한 모습이었다.
연주되는 악기도 우리의 전통악기인 피리와 징·북밖에 없었다.
이날 취재차 왔다가 현장에서 만난 독매신문의 「니시노」 (서야호평) 기자는 오래된 신문기사(1984년 10월25자 조일신문 석간) 하나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민속예능학자 「미즈미」(삼우치웅)씨의 「한국의 민중예능과 일본」이란 글이 실려 있었다.
「미즈미」씨는 그해에 일본전국을 순회공연하였던 우리나라 남사당놀이 (물론 꼭두각시) 를 소개하면서 그들의구구쓰놀이와비교, 우리의「홍동지」와 그들 인형중 「주길」 이라는 괴뢰가 매우 닯았으며, 양자 모두 민중예술로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강조했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모든 악령을 달래고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기위해 4년만에 한번씩 열리는 고표무 (신상박) 를 위해 열심히 구구쓰연습에 몰두하고 있있다.
이상으로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소장 김사엽) 가 일본전역을 대상으로 5년에 걸쳐 펼칠 일본속의 한국문화 현장조사 사업중 제1차연도 구주지역조사작업을 마무리 짓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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