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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서 시가 나온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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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시인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과거 시인이라면 「천상을 꿈꾸는 바닷동물」이라는 애칭과 부합하는 실직자를 비롯해 교사·기자·출판사 근무등의 희고 긴 손가락을 가진 직업들이 주로 떠올랐으나 80년대 이후부터는 구릿빛 얼굴로 노동현장에서 있는 건설현장 인부·농민등을 비롯해 수녀·신부·연극인·세일즈맨등 시인의 직업은 사회 각계층으로 그 범위가 넓어져 가고 있다.
이것은 시를 빚어내는 사회적 환경의 다양화 추세와 함께 독자들도 삶의 가장 첨예한 현장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공사판 인부로 전국을 떠도는 김해화씨가 시집 『인부수첩』을 발간했으며, 대구 반야월 본당의 이정우신부가 시집 『이 슬픔을 팔아서』를 내놓았다.
또 경남 사천군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정간주씨와 경기도 화성군에서 농부로 일하고 있는 홍일선씨가 각각 『이삭줍기』와 『농토의 역사』를 선보였으며, 시골국교 교사며 역시 직접 농사일을 하고 있는 김룡택씨가 시집 『맑은 날』등을 간행해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현재 이들에 대한 평가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단지 체험의 특수성, 현장의 삶이라는 점만으로 독자와 호흡을 같이했던 80년대 초반의 거친 작품에 비해 이들 작품은 시적 완숙미가 매우 높아져 서정성의 획득에도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시집을 발간한 이들 외에도 80년대 중반들어 활동한 시인들을 살펴보면 공장기능공으로 일하고 있는 박노해씨의 시집『노동의 새벽』은 김룡택씨의 『섬진강』과 함께 본격문학으로 문단과 대학가의 큰 주목을 받으며 2만5천여부가 팔려나갔으며, 이해인수녀의 여러 시집·수필집들은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70년대말 이후 단 한번도 그 목록이 빠져본 일이없다.
또 버스 안내양이었던 최명자씨와 방직회사 여공이었던 정명자씨가 85년 3월과 6월에 자신들의 애환을 엮어 간행한 시집 『우리들 소원』과 『동지여 가슴맞대고』는 각각 3판을 찍었고, 서적 외판원이었던 한상원씨와 노동현장에서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는 박영근씨의 시집들도 젊은층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한때 영등포시장에서 닭장사를 했던 정규화씨가 가난과 방황속에서 섬세한 삶을 이야기한 시집『스스로 떠나는 길』을 최근 내놓았으며, 경기도 양주군과 전북군내에서 농사를 짓는 김영안씨와 이병동씨가 시집 『나는 작은 영토에』와 『달무리의 작인들』을 금년초에 각각 발간했다.
이밖에 석지현·박진관스님등 승려 시인들의 활동도 매우 활발하며 전도사인 김창규씨, 연극인 이영유씨, 시골의사인 나해철씨, 지리산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송희철씨등이 꾸준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문학평론가 이남호씨는 『기존 시인들의 직업이 주로 지식계층에 머물러 왔다는 것이 우리시문학의 영역이 좁은 이유중 하나』라며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할수 있다는 것은 우리 문학의 지평확대를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씨는 『80년대들어 기존시의 규범이 급격히 해체되며 문학적 자기 표현이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이른바 문학의 대중화현상이 일어나게됐다』며 『서로 삵의 결이 매우 다른 김룡택·박노해·이해인씨등의 시가 독자들에게 환영받은 것은 이들에게는 삶이 곧 시라는 공통된 의식이 잠재되어 있기때문』이라고 밝혔다. <양헌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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