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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은행원의 갑작스런 죽음…법원 "업무상 재해"

중앙일보

입력

 
2014년 1월 어느 날 새벽 한 샐러리맨(이모씨. 당시 49세)이 목숨을 거뒀다.

이씨는 잘 나가는 은행 지점장이었다.

1990년 A 은행에 입사한 뒤 이씨는 일만 보고 달려왔다. 기업금융 전문가인 이씨는 실적이 좋아 입행 동기들에 비해 승진이 빨랐고 기획재정부 장관 표창 등 상도 여럿 받았다. 2012년에 근무했던 인천의 한 지점을 내부 종합업적평가에서 기업금융 분야 전국 1위로 끌어올린 뒤 2013년 서울의 B금융센터(대형 지점)의 장으로 부임했다.

B센터는 주변에 여러 A은행 지점들과 다른 은행 지점들이 밀집해 경쟁이 극심한 지역에 있었지만 이씨 부임 전 실적은 A은행의 10개 초대형 점포 중 8위로 저조했다. 기업금융과 소매금융을 함께 다루는 탓에 업무 부담도 컸다.

본부장 승진을 앞둔 이씨는 B센터의 실적을 끌어 올리기 위해 퇴근 후나 주말에도 고객관리를 위한 술자리ㆍ골프 모임을 이어갔다. 그런 탓에 지방간ㆍ대사증후군ㆍ고혈압ㆍ고지혈증ㆍ갑상선기능항진증 등 지병을 달고 살았다. 2010년에는 원혈탈모증 치료도 받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하는 날도 많았다.

2013년 한 해를 쉼없이 달린 결과 종합업적평가에서 2위를 기록했지만 이씨는 1년 내내 1등을 유지하다 뒤집힌 게 속이 쓰렸다. 세상을 뜨기 전 날 직원들과의 회식은 이씨의 마지막 술자리가 됐다. 며칠 전 자신의 본부장 승진이 좌절된 데 이어 그날 인사발령에서 승진 대상자였던 직원들 여럿이 미끄러져 잡은 송별회 및 승진자 축하연이었다.

이씨는 술자리 내내 여러 번 “내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며 미안함과 아쉬움을 드러냈다. 평소(소주 1~2병)보다 많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간 이씨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

장례 후 이씨의 아내는 근로복지공단에 장의비와 유족급여를 신청했지만 지난해 4월 공단측은 “사망 저 단기 또는 만성 과로 등이 확인되지 않았고 업무실적에 대한 압박 등은 오랜 기간 경험한 통상적 수준”이라며 지급을 거절했다. 사망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행정법원 5부(부장 강석규)는 “이씨의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인한 것”이라며 근로복지공단의 유족급여 등 지급 거절(부지급) 결정을 취소했다. 재판부는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 관계가 없더라도 적어도 과로나 업무상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과 겹쳐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켰다면 인과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어 재판부는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해야 되는 것은 아니고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정되는 경우도 입증됐다고 봐야 한다”며 “평소 정상 근무가 가능한 정도의 기존 질병이 직무 과중 등으로 인해 급격히 악화된 경우에도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씨는 업무상 스트레스가 고혈압ㆍ지방간ㆍ대사증후군 등 기존 질환을 급격히 악화시켜 발생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씨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결론냈다.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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