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거부 급할 것 없다|성병욱<편집부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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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시안게임과 함께 국민에게 찬사가 쏟아지면서 정치와 정치인의 성가는 급락지세다. 엄격히 말해 정치인만의 탓 일순 없지만 수십 년래 나라의 정치수준이 제자리 아니면 뒷걸음질이니 정치인들이 도매 값으로 동네북이 되어도 항변하기가 멋 적게 됐다.
시대의 과제라고 하는 민주화 개헌문제에 있어서도 여-야 대화는 정부형태와 선거방식에 걸려 원점에서 맴도는지 이미 오래다. 도대체 여야정치인들간의 대화와 협상으로 현재의 경색이 풀릴 것인가, 이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걱정이 쌓여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개헌의 정부형태를 국민에게 물어 결정하면 되지 않느냐는 아이디어는 일견 신선 감이 있어 보인다.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우선 주게 된다. 국민의 양식에 대한 신뢰와 국민수준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마당이라 더욱 그렇다.
여야정치인이 물지 못한 숙제를, 더구나 그로 인해 언제 우지끈 뚝딱하는 소리가 날지 모르는 불안의 요인을 국민에게 물어 그 결과에 따라 해소하기로 한다면 그 보다 더 시원한 일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국민투표제의는 한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걷어차기에는 제안자체가 지니는 호소력이 강하다.
정부형태에 대한 선택적 국민투표는 공식으로 신민당이 제의했지만 타당에서도 이미 가볍게 나마 얘기가 오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선택적 국민투표는 현재의 경색을 푸는데 있어 매우 그럴듯한 아이디어로 보인다. 다만, 이 아이디어가 실행에 옮겨지기 위해서는 법적·정치적으로 큰 문제점은 없는지, 논쟁을 가라앉힐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는지 검증을 거쳐야 한다.
첫째가 법적 검증이다. 헌법상 문제가 없느냐를 따져야 한다. 집권 측은 개헌을 전제로 정부형태를 국민선택에 맡기는 국민투표에는 위헌성이 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헌법의 국민투표조항은 47조의「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관한 국민투표와 131조 2항의 개헌 국민투표로 나뉘어져 있다. 개헌절차는 헌법에 별도조항이 있는 이상 개헌에 관한 국민투표는 마땅히 131조의 절차에 의해 국회의결을 거친 뒤 국민투표에 부쳐야지 47조의 중요정책에 관한 국민투표조항을 원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주장에는 일리가 있고, 적어도 선택적 국민투표안이 헌법조항에 비추어 편법적 발상인 건 틀림없다.
그러나 편법이라는 비판 정도는 몰라도 위헌이라고까지 할 때에는 그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선 헌법규정이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75년 유신헌법 하에서 당시 헌법에 대한 국민의 지지여부를 정권에 대한 신임과 묶어 행한 헌법문제에 관한 국민투표의 전례가 있다. 그때도 잠시 위헌 론이 나오긴 했지만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다.
또 헌법학자중에는 헌법47조에 의해 정부형태를 선택토록 하는 국민투표는 위헌여부의 문제가 아닌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는 사람이 꽤 있다.
헌법운용의 실제와 관련해 다른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자. 국회의 국무위원해임결의의 경우를 보면 원래정식 해임 안은 헌법99조에 의해 재적의원 3분의1이상이 발의해야만 하게 돼 있다. 그러나 야당의석이 모자랄 경우 정식해임 안은 낼 수 없으니까 법적 구속력이 없는 일반의안 형식의 해임권고 결의안으로 국회에 제안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위헌 론이 제기되긴 했지만 결국 법적 구속력 없는 정치공세의 차원에서 국회의 정식의안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사안이 고도의 정치성을 띠게 되면 헌법해석에도 융통성이 부여됐던 선례들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국민투표가 정치적으로 문제해결 기능을 과연 다 하겠느냐는 점이 검증돼야 한다.
정부형태를 둘러싼 정치논쟁을 끝내기 위해 국민투표를 해보자는 건데 논쟁을 잠재우기는 커녕 오히려 논쟁의 불씨만 더한다면 그런 국민투표는 해 봤자 아무 득이 없다.
국민에게 선택을 맡긴다는 건 여야가 국민투표 결과에 승복해 그 결과대로 개헌안을 만들어 국회를 통과시키겠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정부형태와 선거방법을 둘러싼 지금의 정치논쟁이 국민투표로써 완전히 가신다는 전망이 서야 한다.
만일 또다시 투표 과정의 불공정이나 부정 등 이 문제돼 패배한 쪽이 합의 개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거나 새로운 정치투쟁에 나서기라도 한다면 그런 국민투표는 결과적으로 안 하느니만 못하다.
따라서 국민투표로 가기 위해선 서로가 상대방에게 국민투표 이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주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러저러한 전제조건을 너무 많이 거는 건 그런 전망을 흐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렇게 국민투표가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효한 방법으로 결론 나기 위해선 법적·정치적 검증과정이 앞서야 한다. 여야간에 집중적인 대화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회개헌특위는 국민투표를 위한 유력한 대화의 장으로도 활용될 수 있으며, 그런 뜻에서도 헌특의 조속한 정상화는 필요하다.
아무든 선택적 국민투표제안에 대해선 간단히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기 보단 우선 충분히 논의해 보자는 게 순서일 듯하다. 논의해 본 결과 개헌문제에 관한 현재의 경색을 푸는 좋은 방법으로서 헌법상별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면 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도저히 위헌 론을 극복하기 어렵다거나,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전망이 서지 않을 때는 그때 가서 버린다 해도 결코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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