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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 그 후…"사랑한다"는 말 처음 가르쳐준 딸 아직 잊지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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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만나서 지금 안주 먹고 있어. 금방 갈게 엄마.

지난 5월 17일 오전 12시40분쯤 딸 고운(23·가명)이가 보낸 마지막 문자였다. 딸의 문자를 본 어머니 A(54)씨는 '늦지 않게 들어오라'는 답장을 보낸 뒤 밀린 빨래를 했다.

고운씨는 끝내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는 이날 오전 1시20분쯤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김모(34·구속 기소)씨가 휘두르는 흉기에 찔려 숨졌다.

여성 폭력 반대 운동을 촉발시킨 '강남역 화장실 살인 사건' 이후 5개월이 흘렀다. 사건은 단순히 '미래가 창창하던 한 청년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 여성을 위한 추모 공간이 마련됐고 '여성 안전''여성 혐오' 등의 사회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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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경기도 성남의 한 커피숍에서 고운씨의 어머니 A씨와 아버지 B(57)씨를 만났다. A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깨알같은 글씨가 적힌 포스트잇 몇 장을 내밀었다. 그의 두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추석 연휴를 앞둔 이달 17일 고운이에게 쓴 편지였다. 딸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마다 늘 그리 한단다.

'내가 아무리 우기고 아니라고 해도 네 옆엔 내가 없고 내 옆엔 네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히 현실이 맞는데 난 아주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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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씨 어머니의 쪽지.

부모는 스마트폰 사진첩에 빼곡히 담긴 딸의 사진도 보여줬다. 앳된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까지 딱 그 또래의 얼굴이었다. A씨는 쉴새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A씨에게 휴지를 건네는 B씨의 눈도 붉게 충혈돼 있었다.

고운씨는 무뚝뚝한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가르쳐준 딸이었다. 전화를 할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딸은 절대 전화를 끊지 않았다. 마음이 약한 엄마에게는 든든하고 믿음직한 지원군이었다. 학창시절부터 부모에게 손 한 번 내민 적 없던 딸은 20대 초반 일찌감치 취업을 해 가족의 살림을 도왔다. 사고를 당한 그날은 매주 평일 하루 정도를 쉬는 고운씨에게 모처럼 주어진 이틀 연휴 중 첫 날이었다.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고운씨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어둔 채 학교 선배를 만나기로 한 강남역으로 향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극히 평범한 휴일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고운씨는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왔다.

딸의 장례를 치르고 4개월이 넘게 흘렀지만 가족들의 시계는 그대로 멈춰있다. 아직도 사정을 잘 모르는 이웃들은 "딸이 요샌 집에 잘 안 오네?"라고 묻는다. 그럼 "어디 멀리 갔어요"라고 말한다.

가족들의 시계가 멈춰있는 동안 딸의 사건은 건물 내 남녀 공용화장실 문제, 여성혐오 범죄 등 한국사회에 수많은 과제와 갈등들을 남겼다. 사건 발생 직후 서울시는 자치구와 함께 서울 시내 남녀 공용화장실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민간 건물의 경우 법적 강제성이 없다는 점이 한계로 남았다. 경찰은 가용 경력을 총동원한 치안 활동을 폈다. 실제로 서울경찰청이 사건 발생 후 6월 한 달 간 '여성 불안요소 집중 신고기간'을 운영한 결과 총 3629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이러한 시류에 정부도 여성 안전과 관련된 다양한 대책들을 내놨지만 아직 시민들이 체감하긴 어려운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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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범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여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리고 이 불안은 여성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겪는 불합리한 상황들, 즉 '여성혐오' 논의로까지 확대됐다. '일부의 범죄를 전체로 몰고가지 말라'며 반발하는 남성들과의 '성 대결' 국면으로도 치닫았다. 이 와중에 검찰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고 결론 내리면서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이 모든 상황들을 가족들은 어떻게 지켜봤을까.

"저희는 딸이 약한 '여자'였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건 명백하다고 봐요. 고운이가 남자였다면 가해자는 고운이를 보내고 다른 여자가 들어오길 기다렸을 거잖아요. 처음 10번 출구에 추모 공간이 생겼을 때는 참 감사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다툼들, 급기야 몸싸움까지 벌어졌을 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습니다. 우리 고운이가 이용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지난달 30일에는 서울중앙지법서 가해자 김씨에 대한 결심공판이 있었다. 이날 김씨는 최후진술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이라 저는 만족한다" 등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늘어놨다. 검찰은 "정신질환을 감안해도 김씨가 의식과 사고가 불가능한 심신상실자는 아니다. 충분히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현재까지의 진술 및 태도에 비춰보면 반성이 없는 걸로 보여 죄질이 절대 가벼워질 수 없다"며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구형과 함께 검찰은 고운씨가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의 몇 구절을 읽었다. '작은 선물에도 고맙다며 기뻐해주셔서 감사해요. 해 준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고만 하시는 부모님, 정말 감사하고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해요.' 현장에 있던 고운씨의 가족들은 오열했다. 1심 선고는 오는 14일 오전 11시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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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씨 유품에서 나온 부모님께 쓴 편지.

"기자님. 우리 고운이 진짜 나쁜 애 아니에요. 이 말 좀 꼭 써주세요."

어머니 A씨는 인터뷰 내내 몇 번이고 강조했다. 인터넷 기사에 '여자애가 왜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술을 먹었냐''그렇게 놀러 다니니 죽을만 하다' 등의 댓글이 부모는 내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너무 착한 딸이었다고, 자기보다 가족을 더 생각하는 딸이었다고 부모는 몇 번이고 강조했다. 두 사람은 얼마 전 지하상가에서 패딩 점퍼와 검정색 신발을 한 켤레 샀다. 생전 딸이 좋아했을 법한 스타일로 골랐다. 조만간 태워서 딸에게 보낼 거라고 했다. 그렇게 부모는 또 한 번 딸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사진 강남역 살인 피해자 유족,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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